동남아 외무장관 부인들
마닐라 외무장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별도의 스케쥴이 잡혀있었다. 주 필리핀 박동순 대사 내외는 전부터 아는 사이었다. 박 대사도 의욕적이며 실력 있는 외교관이고 나의 후배인 부인도 필리핀의 상류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부인들과의 친분을 쌓은 유능한 외교관 부인으로 내조가 돋보였다.
박 대사 부인은 매일 각종 행사참여뿐 아니라 필리핀 여성지도자들과의 회식에 이르기까지 나를 수행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한국에서 원조하는 고아원에도 갔는데, 한국 수녀님이 그 많은 현지 아이들을 선도하는 모습에 감동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박 대사 부인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전직 국회의원이고 정치학 박사이며 현재 정치학 교수라고 자랑을 하면서, 적재적소에 소개를 시켰다. 그 모습에서 진정한 외교관 부인의 모습을 보았다. 외교관 부인들이 박 대사 부인만큼 의욕적이고 활동적이고 품위가 있다면 한국외교의 반은 부인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시안 국가 외무장관 부인들 행사에 참석했을 때 여러 부인들이 나에게 와서 “이번에는 Mrs. Yoo 가 아니고 Mrs. Park이네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한국의 외무장관이 자주 교체된다는 뜻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는 남편이 장관직을 떠나게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기에 “싱가폴에서 개최될 아시안 회의에는 이 Mrs. Park이 꼭 참석할 테니 이름 외우느라고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싱가폴 회의에서는 그들은 유 씨도 아니고 박 씨도 아닌 홍 씨 부인이 참석을 했으니! 생각하면 창피스럽다. 인도네시아 장관 부인은 8년째라고 했고 그밖에 거의가 4-5년 남편들이 장관직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부인들끼리는 친숙하게 대화도 하고 부부끼리도 농담도 하니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베트남 공식방문과 홍콩 방문
사전에 계획된 대로 수행기자단과 같이 마닐라를 떠나서 공식초청을 받은 베트남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나의 성격 때문에 그이는 가급적이면 어려운 일을 내게 감추려고 할 때가 많았다. 그때도 평소의 그이답지 않게 우울해 보였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을 때여서 막연히 궁금하기만 했다.
대우가 지은 하노이호텔에 머물렀다. 그전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갈 때마다 한국의 베트남 진출의 상징물 같아서 마음이 뿌듯한 장소이기도 했다. 도착하자 부부동반 공식방문 행사가 있었고, 그 외에 그이가 회의하는 동안 조용하고 얌전한 조원일 대사 부인이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마닐라에서와 같이 고아원에도 가고 한국인 학교도 방문하는 등 여기저기 다니며 인사말도 하는 등 무더운 날씨 때문에 원 없이 땀을 흘리며 다녔다. 몇 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거리가 온통 자전거로 뒤덮였는데 이번에는 오토바이로 바뀌었다. 아마 지금쯤은 자동차 수도 늘어났을 것이다.
70년대부터 서서히 도이 머이(Doi Moi.개혁개방)정책으로 제한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면서 만년 쌀 수입국이 이제 태국에 이은 세계 2위 쌀 수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북한은 언제나 반세기 이상의 세습 독재와 폐쇄주의를 털어버리고 베트남식 도이 머이를 도입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부러워했다.
구엔 컴 부 총리 겸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베트남 측에서는 대한국 무역적자해소,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의 추가 제공과 무상 원조 확대 지원을 요청했고 우리 측은 우리 기업 수출미수금(8천2백만 불) 회수와 ‘베트남 중앙은행 전산시스템 구축사업’ 참여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제5차 경제공동위 (하노이) 및 제 4차 정책협의회 (서울) 연내 개최에 합의하고, 외교관 관용여권 사증면제협정에도 가서명했다. 그이는 이어서 레카 퓨 공산당 서기장, 판 반 카이 총리도 예방했다.
오는 길에 홍콩에 들려서 대통령 홍콩 방문과 관련해서 총영사의 보고에 따라 대통령이 유숙할 숙소를 돌아보고 H.K. Convention & Exhibition Centre 에서의 대통령 연설 가능성에 대해 검토했다. 대상은 홍콩 Trade Development Council 회원이라고 했다.
투자유치와 금융활동 관련 사항으로서는 홍콩 전기, 전자 등 3개 투자조사단이 방한할 예정이며 홍콩 주재 주요 외국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한국 담당자들로 하여금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와 분석의 기회를 갖게 했으면 좋겠다는 홍콩 주재 총영사의 건의가 있었다.
베트남 공식 방문과 홍콩 방문이 그이가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행사가 되었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기저기에서 받는 위로의 말을 듣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남편의 운명에 예정되어 있는 불가항력적인 불운 때문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장관자리가 탐이 나서도 아니고, 그 자리에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그이도 나도 또 남들도 우리가 가장 국가에 자신 있게 봉사할 수 있는 분야가 외교라고 생각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했고 국회에서도 소위 ‘생기는 것이 없다’는 외무위원회에서만 활동을 했다. 김 대통령이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놓고 선거운동을 했듯이 그이도 준비된 외무장관 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우리는 제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했다.
20여 년간 외무위 활동을 통해 전 세계를 누비고 외무부를 상대해오면서 그이는 외무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온데 대해 무척 흥분해 있었다. 그이는 그 개혁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다른 부처의 잘못을 책임지고 물러났으니 가족뿐 아니라 제 삼자들도 황당했고 안타까웠는데 본인의 가슴은 더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는 말 한마디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차라리 투정이라도 하고 변명이라도 할 것이지 혼자서 삭히고 삭히다가 그것이 암이 된 것이 아닌지? 1년 반 만에 암 환자가 되어 3년 이상 투병 끝에 이 세상을 떠나다니! 생각할수록 목이 메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