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언론, 국익, 인권문제
앞서 언론에 대해 잠간 언급했지만 마닐라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 신문사에서는 데스크 기자가 쓴 기사를 수행기자의 이름으로 인쇄를 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다음날이면 그 기사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다른 신문들이 용어 선택만 다르게 릴레이식으로 받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밤 모 신문 가판에 모 기자이름으로 쓴 박스 기사의 제목이 “망신외교 왜 문책 안하나”여서 외교부가 항의를 했더니 빼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조판에는 같은 기사에 기자 이름이 마닐라 수행기자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읽어보니 내용과 제목이 일치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참기 힘들었지만, 그이는 모두 자기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있느냐며 잊어버리라고 나를 달랬다.
물론 정보 제공자들의 동기나 그들과 그이와의 관계까지 기자들이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대표와의 협상 중에 있는 국가 대표에 대한 인신공격성 기사들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상대방이 우리 측 협상자를 무시하게 만들 것이며 협상자의 사기를 꺾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링 위에 선수를 올려놓고 응원 대신에 비난만 퍼 분다면 그 선수는 싸울 수 없는 것이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주한 외국대사들이 여러 곳에서 우리내외를 위한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그중에서 xuong 베트남 대사내외 주최 만찬에서 Pham Van 외무성 사람이 “한국 언론이 상대국인 러시아는 비판하지 않고 자기편을 두들기는 것은 기현상”이라고 지적했을 때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은 그이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주간지나 월간지에 실린 한.러 외교 분쟁에 대한 심층 분석은 마닐라 회담기간 중의 감정적인 언론보도와는 달리 객관적이며 분석적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 한국을 가지고 놀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나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안기부 대리전 치르고 책임도 몽땅 덮어 써’ 등의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마닐라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후 모신문사 주미 특파원이 그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닐라 사건에 대해 러시아, 안기부, 외교부를 얼버무려서 취급한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하면 그이는 무척 운이 없는 사람이다. 외국에서 큰 공을 세울 때는 국내에서 큰 사건이 터져 매스컴의 주의를 받지 못하곤 했는데, 불행하게도 러시아와의 협상 때는 국내에서 언론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가 전혀 없어서 열흘간 내내 그이만 얻어맞게 된 것이다.
벌써 7년이 지난 사건이다. 한때 군에서는 북한의 잠수함 침투, 미사일 폭파사건, 조명탄 오발 등 일련의 사고가 연이어 터져도 국방장관을 경질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치러진 외교부장관 해임사건으로 다른 장관들이 덕을 본다고들 말했다.
다섯째, 장관 해임이 현명한 해결책?
객관적인 정치 학도로써 한.러 외교 분쟁의 전말을 놓고 볼 때 반드시 장관해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 현지 대사 소환 정도의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이 사건의 특성상 정보실무자 가운데서 누군가를 책임지게 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설령 그이의 다른 측면이 대통령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임시키고 싶었어도 일단 분쟁이 완결된 후 다른 이유로 퇴임시켰더라면 한국이 러시아에 ‘무지막스럽게 굴복했다(언론에서 표현한 말)’는 인상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그러한 극한적인 조치에 처음에는 경악했고, 한숨 돌린 후에는 역시 한국은 ‘쎄게’ 나가면 굴복한다는 좋지 못한 전례를 세웠다고 본다. 안기부에서도, 청와대에서도 윗분을 잘못 보좌한 전형적인 케이스가 아닌가 한다.
나는 마닐라 외무장관 회담이 저자세 외교가 아니라, 장관 해임이라는 과잉 결정이야말로 저자세 외교의 극치라고 말하고 싶다. 연대 양승함 교수도 국정원에 갔을 때 장관해임은 오히려 굴욕외교라고 지적했다는 말도 들었다.
이인호 대사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가에서는 너무나 뜻밖이며 장관까지 해임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홍순영 장관이 모스코에 공식 방문했을 때, 프리마코프가 “러시아에 잘못하면 장관이 교체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 외교부 장관 해임은 결국 러시아를 기고만장하게 만들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굴욕 외교가 아닐까? 주권국가로서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기사에는 한 정보 전문가가 “1차 회담 때 아예 러시아와 깨끗하게 한판 붙고 헤어졌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고, 그러나 박 장관은 프리마코프와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한 뒤 본국에 훈령을 요청했다고 마치 훈령요청이 잘못된 것처럼 썼다. 우리의 국력이 과연 강대국과 한판 붙고 헤어질 형편인가? 국제정치에서의 힘의 논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망발같이 들린다. 우리도 하루속히 국력을 강화시켜서 강대국과 한판 붙기도 하고 결별도 하고 강경책으로 밀고 나가도 반격을 당하지 않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건 직후 정치인 외교부 장관을 커리어 외교관들이 흔들었다는 루머가 돌았 다. 그러나 그이는 그러한 루머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이는 간부들을 아꼈고 열심히 보좌한 그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은데 대해 자신의 책임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장관도 무력하지 않을 수 없는 냉엄한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그들인들 실세에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안기부 직원들도 열심히 이종찬 부장을 보좌했으리라고 믿는다. 이 부장과 그이와의 관계를 봐도 이 부장이 의도적으로 박 장관을 해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보요원 추방문제를 주도적으로 담당한 안기부 관계자들이 이 부장을 제대로 보좌했느냐의 문제, 즉 그들의 정세분석 능력과 언론 플레이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교수들이 “그곳이 어떤 곳인데 과연 상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언론플레이가 가능하겠는가?”라며 나를 순진한 사람으로 몰지만, 남편이 생전에 이 부장과의 관계를 원망 없이 유지하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마닐라 회담을 ‘실패한 외교’라고 비난하는데 대해 공노명 전 외무장관은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응답했다.
“외교는 제로섬 게임으로 감정적으로 할 일이 아니라 쌍방이 만족하는 조치를 찾는 것이 좋다. 이 사건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말고 망원경으로 조망하는 자세로 해결해야 한다. 골프도 이기고 지는 것은 4라운드를 마친 후 장갑을 벗고 나서야 아는 일이다. 매 홀마다 버디냐 보기냐 하면서 일희일비해도 승리여부는 마지막 순간에나 아는 거다. 외교도 그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