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한·러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부처 간의 힘의 논리, 책임회피 등이 문제이며 이런 우리의 현실이 시정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특히 언론에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점은 국익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 그렇게 됐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한 남편의 짧은 퇴임 소견을 한국일보의 윤승용 정치부 기자는 이번 한・러 외교 분쟁에서 ‘국내 정치적 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고백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학자들 간에는 뭘 믿고 아브람킨 추방이라는 강수를 취했는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러측에서 앞으로 양국 간의 일체의 정보 협력을 동결하겠다는 강경한 반격이 만만치 않자 안기부는 큰 충격을 받고 당황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실책의 책임을 외교부로 떠 넘기려는 언론 플레이가 시작되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한·러 갈등 과정에서 그이가 상임안보회의 소집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수라고 생각하며 그이도 후일 그 일을 후회했다.
언론 보도를 좌우한 것은 안기부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무서운 일은 특정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의도적 언론 접근이 왜곡된 언론기사에 한몫 했다고 본다. 우리는 마닐라에서 귀국할 때까지 언론이 이성을 잃은 듯 망신외교, 기만외교, 굴욕외교 등 사실과는 거리가 먼 비판으로 일관하고 나오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다자회담과 미, 일, 러, 말레이시아, 타일렌드, 필리핀 등 양자회담으로 그이는 새벽부터 밤까지 뛰고 다니면서도 호텔에 와서는 국내신문기사 때문에 잠잘 시간을 뺏겼다. 내 남편이지만 성품이 온화해서 평소에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박정수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 자리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귀국 후 여기저기에서 들려준 내용으로 짐작할 수는 있었고 거의 사실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이와 같이 안기부는 안기부대로 자기들의 잘못을 변명하고 보호하기 위한 언론플레이를, 모 세력은 이 기회에 그이에게 홀딱 뒤집어 씌워서 제거하기 위한 언론플레이를 한 결과, 험악해지는 신문보도에 놀란 대통령이 해임이라는 강수를 두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의 생각이다.
셋째로, 러시아의 무례한 외교행태를 배우다:
많은 언론에서 지적했듯이 마닐라 회담은 우리 외교사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사례로 남게 되었다. 러측이 국제관례와 상호간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깬 일련의 행태는 전후 민주국가인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상식을 초월하는 행위였다. 우선 조 참사관을 추방할 때도 국제관례를 깨고 2시간이나 억류했으며 언론에 공개하는 등 비례를 범했으며 양국 정보 관계자간에 도출한 사전합의도 무시해버렸다.
그뿐 아니라 양국 외무부 간에 사전 합의된 의제도 존중하지 않았고 그 무엇보다도 프리마코프는 자기가 먼저 언론공개를 하지 말자고 요청해놓고 자국 언론에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고 발표를 하는 비례를 범했다.
그가 국제적 관례도, 약속도, 최소한의 신의도 지키지 않으면서까지 자국 언론에 협상 내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급한 국내정치적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구소련 정보부장을 지낸 프리마코프의 외교행태는 러시아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고 본다.
한겨레 박찬수 기자는 ‘우리는 러시아를 너무 몰랐다. 반면에 프리마코프는 한국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한국이 무릎 끓으리라는 사실을 러시아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러시아를 너무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법이건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는, 일방적인 프리마코프의 행태를 예측하지 못했다.
우리가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속담에 있는 ‘엎드려 절 받기’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 측은 러시아의 요구를 ‘정보 당국 간에 협의를 통해서’라는 단서를 붙이고 ‘검토하겠다’고 했는데도 그는 원래 러측이 제안한 ‘후임자가 올 때까지 아브람킨이 한국에 체제한다’로 합의가 되었다고 거짓 발표를 한 것이다.
즉 자기들 요구에 근접한 용어를 이용해서 마치 한국이 굴복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러한 행태는 ‘hit and run’게릴라식 외교라고 볼 수 있다. 우리 항의에 대해 그것은 어디 까지나 ‘국내용’이라고 상식 밖의 변명을 했으니 국제적인 도의도 지키지 않은 셈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런 각도에서 러시아와 프리마코프를 신랄하게 비판했어야 했다.
2차 회담이 있던 날 저녁 리셉션에서 나도 프리마코프를 만났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생김새와는 달리 친절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표정으로 가을에 “남편이 모스코를 공식 방문할 때 같이 오라”고 하며, 자기 아내도 직업 여성이며 바빠서 동반하지 못했다고 했다(심장 전문의라고 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프리마코프의 돌출행위는 “감히 한국이 러시아 같은 강대국을 함부로 보다니!”라는 자존심 싸움에서 한판 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암시했듯이, 결국 아브람킨 참사관을 한국에 보내지 않았다. 재입국 허용을 검토하게 만들었다는 그 자체로 일단락 지어버린 사건이 되었다.
둘째로, 한.러 외교분쟁에서 체험한 구 공산권 국가의 외교 형태와 패턴은 앞으로 동구권과의 관계에서 좋은 본보기로 참고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