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갈등에서 얻은 교훈_1 (101회)
  제13장 남편의 외교통상부장관 시절

끝으로 몇 가지 한·러 갈등 사건의 문제점과 교훈을 내 나름대로 간략하게 짚어 보았다.

첫째, 초반 대응 전략에 문제가 있다. 

올레그 아브람킨 카드가 현명한 결정이었는가의 문제이다. 민간인도 아닌 외교관을 매수한 현행범인 조성우 참사관의 상대로 그만한 증거가 있는 사람을 선정했어야 하는데 아브람킨 참사관이 범한 구체적 불법 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닌 게 아니라 러 측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치고 말았다.

외부인이 모르는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강경 결단을 내린 데에는 안기부 나름대로의 피치 못할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는 국가라 해도 구소련 시절 강대국의 자존심이 살아있는 러시아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잘못이었다.

일찌감치 청와대가 국정원 주도권을 인정했고 국정원 관계자도 “정보요원의 추방 결정은 국정원의 고유권한이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다” 라고 못 박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바로 이 발언에서 “왜 외교부는 이 사건을 조사한 후 유감표명 정도로 끝내자는 초기 입장을 고수하지 못했나?” 라는 비판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 안기부 관계자가 한 말이 어느 언론에 인용되었다. “내 목숨을 걸고 말하는데 외교부가 감을 잘못 잡고 회담에 임해서 일을 그르쳤다. 전적으로 외교부 책임이다”라고 했다는데 주도권을 쥔 안기부의 훈령에 의해 움직인 외교부, 그것도 미련할 정도로 훈령을 지키려다가 언론에 의해 거짓말쟁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는데, 안기부 관계자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측면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조성우 참사관을 추방하게 된 러 측의 진의 파악 실패와 러시아에 대한 과소평가가 아브람킨 카드를 내놓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한 정보 전문가에 의하면 “첩보전이란 양날의 칼과 같다. 저쪽이 칼을 뽑았다고 해서 우리도 칼을 뽑는 게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뽑은 칼에 우리가 다칠 수도 있는데 아브람킨 참사관 추방은 그런 예”라고 비유했다고 한다.

쿠나제 전 주한 러시아 대사가 이인호 대사와의 오찬에서 아브람킨 대신에 공식으로 알려진 정보요원 두 명 중 하급자를 추방했다면 간단히 끝날 번 한 사건이라고 했다고 한다. 러 측의 이르게바예프 한국과장도 쿠나제 대사와 같은 의견이라는 말도 들었다.

주한 수히닌 대리대사는 한국 언론은 추리소설을 쓰는 것 같다며 이번 사건은 한국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식 결정이 나지 않은 정보까지 누출되는 기미가 있어서 외교관들의 기강확립 차원에서 발생된 사건인데 한국이 과잉 반응을 보였다면서 장관교체까지는 상상도 못했고 너무 뜻밖이라고 우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러시아 외무부 간부들(아주국장 등)은 이번 사건은 한·러 관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회성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증명이 되었다.
 
▲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박정수 외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 장관회의를 했다 (1998. 5.16.) / 김종필 총리는 우리 부부를 점심에 초대해 장관인책에 대해  애석해하며 위로를 해주었다 [출처 ; e영상역사관]

또 과연 조성우 참사관이 상부에 진상을 있는 그대로를 보고했는지의 문제이다. 그의 보고 내용에 따라 상부 대응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사관의 안기부 공사가 이인호 대사에게 보고하기를, 사건 전에 조 참사관에게 “러측 은 복무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 치는 경향이 있으니 실적이 없어도 좋으니까 근신하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사건 후 조 참사관의 변은 “모이세예프 국장은 친한 친구사이여서 가정 방문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 했다”고 이 대사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1999년 초 우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주일 김석규 대사가 해준 말이 있다. 자기가 러시아 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도, 조성우 참사관에게 정보협정에 위반되는 외교관들과의 접촉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고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자기가 직접 추방시키겠다는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인호 대사 재임 이전 김석규 대사 시절부터 조 참사관은 이미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야기이다.

항상 매사에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끝까지 꼬이기 마련이며 한·러 정보원 맞추방 사건도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관계 부처 간의 협의체제에 문제가 있다.

헌법에 외교권은 외교부에 위임하고 있다. ‘대외적인 이슈에 관한 종합적 이익조정 기능은 외교부의 고유 권한이며 관계 부처와 협의를 거쳐도 최종 결정은 외교부에 주어져야 한다’는 공노명 전 외무장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그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외교부는 자기들이 내린 정책에 대한 책임도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지키지 못한 사건이었다.

마닐라 회담 이전에 그이가 여러 번 제의한 전략협의를 위한 상임안보회의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안기부가 단독 결정한 정책을 위해 외교부가 아무 권한도, 충분한 자료도 없이 대리전을 치르다가 공개적으로 책임만 뒤집어쓰게 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공노명 전 외무장관은 신문 인터뷰에서 “외국에서는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모든 외교 협상 전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러한 당연한 사실이 한국은 부처 간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안기부의 해외업무를 강화하더라도 전체적인 정부의 부분으로 해야지 정부 안의 정부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는 뼈아픈 충고도 했다.

이번 사건이 그 전형이다. 고인이 된 남편의 메모에도 가장 힘주어 시정되어야 한다고 적어놓은 점이 바로 그것이다. ‘외무장관 회담을 앞두고 안기부가 정보당국간 협의 결과를 외통부에 정확히 통보해 오지 않아서 대응에 어려움이 발생했음을 시인하고 관계 부처 간에 혼연일체가 되어 기탄없는 사전협의 협력체제 가동만이 국익을 지킬 수 있고 협상 중에는 협상자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이는 계속해서 ‘외교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하에서 유관기관의 협의는 긴밀히 하되, 직접 교섭책임자가 아닌 사람들이 부처의 이해관계만을 염두에 두고 배후에서의 언론 플레이로 혼선을 야기함으로써 협상주역의 입지를 곤란하게 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은 결코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론 보도 (1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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