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입당과 전국구 당선 (86회)
  제12장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에서

모두들 그이가 자민련으로 가는 것으로 추측을 하다가 국민회의에 입당하자 뜻밖이라고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어쨌든 정가의 화제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언론에서는 그이의󰡐국민회의 입당은 여당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며 TK출신 중진의원이라는 점 때문에 적지 않은 정치적 충격이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국민회의는 97년 대권가도에서 보수층과 비호남지역으로의 지지기반 확대라는 당면 목표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내용들이었다.

어느 신문기사는 그이가 허주에게 사정을 털어놓았으나 당시 ‘민주계가 중심이 된 당 지도부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탈당과 함께 국민회의 입당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확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신한국당의 김정례 의원은 “허주에게 실망했다. 킹 메이커인 허주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필요한 박정수 한 사람 붙잡을 수도 있었다”고 하며 무척 애석해 하셨다. 정재철 의원도 “우리는 좋은 분을 빼앗겼어요”라고 친절히 말해 주셨다. 그밖에 많은 민정계 의원들이 아쉬워하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그이에게 돈 걱정하지 말고 출마하라고 종용한 민주계 강삼재 사무총장은 공천을 안주니까 다른 당으로 갔다느니, 전국구를 구걸했다느니, 신의 없는 철새 정치인이라느니 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15대 총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조찬기도회에서 “여소야대는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얼마 후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은 “영입작업은 각하의 소신”이라고 발표를 해서 국민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어서 여러 차례 당적을 바꾼 명실공이 철새 정치인, 선거법을 위반한 정치인들을 대거 영입했다.

당시 자민련의원과 시ㆍ도의원들이 집단적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되어 국민도 놀랐다. 따라서 당시 신한국당의 행태로 보아서는 국민회의나 자민련의 영입행위를 규탄할 자격이 없는 처지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불특정인들이 ‘깨끗한 이미지에 흠이 간 것 같아 애석하다’ ‘DJ는 이용만하고 버릴 것’이라는 등의 전화가 수없이 와서 사실 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했다. 김천이 고향이라며 서울 말씨를 쓰는 한 분은 “전두환 대통령의 공판 뉴스보다 더 큰 사건이 박 의원의 DJ당 입당소식”이라며 “성품이 고우신 존경하는 박 의원이 하필이면 그 당으로 가다니 눈물이 나와 참을 수가 없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협박 전화도 수십 통 받아서 전화를 받기가 겁이 났었다.
 
▲ 한겨레신문 (1996. 2.25.)

3월 23일 국민회의 전국구 명단에 부총재인 그 이가 5번으로 발표되자 친지들이 “DJ가 약속을 지켰군”, “국민회의 색깔이 우려되지만 박 의원에게 기대를 해 본다” 등 위로의 전화가 빗발쳤다. 최상용 교수는 “평소의 소신인 초당외교의 선도적 역할을 기대한다”고 했고 고교동기인 스웨덴의 한영우 박사는 “YS정부가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서 장거리 전화로 축하를 해주었다.

장지량 회장의 권유로 군사학회의 고문이 된 나는 총선 직후 처음으로 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전 정치인이며 군 장성출신 되는 분들이 “우리도 YS가 싫지만 DJ당에 간 것은 반대한다”, “사상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당에서 빨리 탈당하라고 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모두 그렇게 생각해요”, “한반도는 아직 탈냉전이 아니다”는 등 모두가 그이에 대한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표출시켰다.

어디를 가나 한동안 이러한 반응을 감수해야 했다. 그이도 같은 경험을 했으련만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에 대한 거부반응이 이렇게까지 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야당 전국구 의원은 막대한 공천 헌금을 내야 한다고 들었다. 이 때문에 국민회의에서 영입하려고 할 때 남편에게 우려를 표명하니까 돈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공식적으로 부과된 비용은 선관위에 지정된 등록비 1000만 원 뿐이었다.

전국구 5번에 대한 당 기부금은 요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봉급에서 당비 200만원, 부총재비 50만원이 자동 인출이 되어 여당시절에 비하면 많이 궁색해졌다. 남편이 야당으로 간 후부터 나의 저축이 조금씩 줄어갔고 보좌관으로부터 그이가 대출을 받았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15대 국회의원 총선기간에도 국민회의 대구ㆍ경북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자비로 찬조연설을 하러 다니는 등 개인적인 경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야당부인들이 왜 제과점이나 식당, 의상실을 운영해야 하는지를 남편이 야당이 된 후에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내가 교수로써 봉급생활자였기에 다행이었다. 참으로 여야의 사정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이는 TK 지역 선거운동을 하면서 생각보다 엄청나게 높은 지역감정의 벽을 실감했다.

결과는 국민회의 후보는 전멸, 자민련 후보 8명, 신한국당 후보 2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다. 당시 YS와 신한국당에 대한 TK지역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이 선거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자민련의 선전은 다음해 대통령선거에서 DJP연합전선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 요인이 되었다. 

1996년 5월 26일은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제휴한 대규모 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남편이 초당적 외교활동을 명분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지만 오랫동안 양극 정치노선을 걷던 거물급인 DJ와 JP가 손을 잡고 ‘시멘트같이 탄탄한 협력관계’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란 이런 것인가? 하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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