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의 만남과 신한국당 탈당 (85회)
  제11장 문민정부의 시국에서

드디어 2월 22일 허주에게 탈당통보를 했더니 첫마디가 “어느 당으로 가느냐”고 묻고 3월 5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성의 없는 말에 무척 서운해 하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이 남편과 허주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나눈 대화였다.

허주가 조선일보 시절부터 두 사람은 언젠가 함께 멋있는 정치를 같이 해보자고 의기투합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허주를 따라 민정당에 입당한 것이다. 그 후 민정당에서 민자당,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는 수년간 허주와 같은 TK라는 점에서 알게 모르게 그이는 밀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이는 도당위원장이 된 후 당대표가 된 친구의 위상을 높이고 힘을 실어주는데 앞장 서주는 의리의 친구였다.

15대 총선 전의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나였다면 허주를 원망할 법도 한데 그이는 그 후 3년여 간의 투병기간에 그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분명히 서운하고 쓸쓸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이가 그렇게 의지한 허주도 지금은 가고 없으니 진실을 알 수 없으나 분명히 YS는 남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허주는 그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 총선 후에 도울 길을 찾아보려고 기다려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는지도 모른다.

2월초에 성우가 워싱턴에서 가까이 지내던 YS의 막내사위를 만났다고 했다. 성우가 “아버지가 과거 무소속일 때 YS의 민주당 입당을 시도했던 일부터 시작해서 대선 때 김천의 득표율이 부산, 경남 다음으로 높았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면서, 김 대통령 정책을 옹호해 온데 비해 너무나도 푸대접을 받아왔는데 도대체 네 장인이 우리 아버지를 미워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대통령의 막내사위가 한 말을 요약하면 “첫째 지역구 당선가능한 후보가 불출마하면 전국구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그러나 이 원칙은 다른 후보에게는 적용이 안 되었다)때문일 거고, 둘째, 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은 없으나 워낙 부탁하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배제된 것 같다. 한번이나 네 아버지에 대한 부탁을 나에게도 해본 적이 없지 않으냐. 셋째, 지금 네 아버지가 장인을 만나도 출마 권유만 들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헤어지면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하기에 성우가 “만나자고 한 이유는 부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당으로 가셔도 우리 둘 사이의 우정에는 금이 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하니까 “하기야 장인도 DJ와 한때 가까웠다가 헤어진 것 아니냐. 정치란 다 그런 거니까 이해한다”고 대답을 했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아들은 ”결론이 난만큼 선택한 새로운 길을 가세요. 그러니 앞으로는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줄기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MBC 뉴스에 보도된 박정수 의원의 신한국당 탈당

96년 2월 26일은 우리내외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다. 즉, 그이가 국민회의에서 입당식을 갖는 날이었다. 그는 “정당 간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보ㆍ혁 논리가 무의미해진 오늘의 정치현실에서 초당적 외교활동의 기회를 본인에게 제공해준 국민회의를 선택했다”고 하는 말로 그의 입장을 밝혔다.

라디오 방송에서 ‘박정수 의원이 국민회의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으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본집에 온 기분이라고 능청스레 인사를 했다’고 전했다. 기독 학생운동을 같이 하던 정희경 의원, 선배인 이동원 의원, 고등학교 후배인 이종찬, 김원길, 박정훈 의원 등의 얼굴이 보여 생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과거에는 없었던 일로 DJ가 처음으로 직접 꽃다발을 안겨주고 “여당중진이 야당으로 오기는 드문 일이고 어려운 일로 매우 경사스럽다”고 환영사를 했다고 한다. 기자들도 불편한 질문도 하지 않고 당에 활력소를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장영달 의원은 전주 지역구에서 그 행사를 위해 올라와 기자들 앞에서 “박정수 스승님 없이는 오늘날 졸업도 못했고 이 자리에 설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이가 국민대학교 학생처장과 교무처장 이었을 때 정학을 당했던 장 의원이 복학해서 학점을 받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다.

흔히 여당은 부드럽고 야당은 경직된 것 같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으나 막상 가보니 정 반대로 회의도 부드럽고 농담도 오고 가는 분위기속에서 진행되더라고 신기하다는 듯 소감을 말해주었다.

김대중 총재 내외분이 새로 영입된 우리 부부와 김한길 의원 부부를 인터컨티넨털 호텔 중식당으로 초대했다. 나는 이희호 여사와 부산에서 여고시절에 영어성서를 같이 배웠고 그이는 강원용 목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학생 모임에서 그분을 누님이라고 부르던 사이었다. 그러나 일찍 유학길에 오른 우리는 귀국 후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접촉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만났어도 서먹하지는 않았다.

김 총재는 그 자리에서 북한사회를 분석하면서 북한의 강경파보다는 온건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대북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한 생각은 북한체제의 연착륙이 바람직하다는 당시의 미국 국무성 입장과 같은 노선이었다.

우리는 6월 10일 63빌딩 중식당에서 DJ의 초청으로 방한한 스칼라피노(Scalapino) 박사 내외를 위한 만찬에 초대받아 갔다. 그 자리에서 DJ의 영어실력에 우리는 놀랐다. 간단한 회화가 아니라 남북문제에 관한 긴 토의를 끊이지 않고 이어갔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모님보다 정식으로 미국유학도 하지 않은 DJ의 영어구사력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다만 보수적인 나의 사고로는 그분의 대북관이 너무 관대하다는 느낌을 받고 돌아왔다. 그날 스칼라피노 박사의 아내를 향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휠체어에 앉은 부인을 서울까지, 아니 전 세계를 동반해서 여행한다는 말을 듣고 감복했다. 80대인 자기 자신도 혼자 다니기가 힘들 연세에 장애 부인과 같이 다닌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건만…. 그 부부가 우러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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