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고뇌 (83회)
  제11장 문민정부의 시국에서

1995년 중반부터 그이는 자기의 거취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IPU 총회에 같이 참석한 여야의원들이 그이의 고민을 간접적으로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경제적 이유로 지역구는 포기해야 하겠고 IPU 집행위원 자리는 지키고 싶어서 전국구의 가능성을 김윤환 대표를 통해서 그동안 알아본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했다.

9월 11일 그이는 이종찬, 김원길 두 후배 국민회의 의원들과 조선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왔다.  전국구를 보장 할 테니 국민회의로 오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당에는 우리 같은 배경의 인물들이 많지만 야당에는 그렇지 않다며 특히 TK 중진 의원인 만큼 대어를 낚은 격이므로 큰 역할이 주어질 것이라고 입당을 설득했다고 한다.

남편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평소에는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숙면에 빠지는 그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자다가 일어나보면 새벽 3시에도 응접실에서 잡지를 들추면서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러한 남편의 모습을 보는 나도 가슴이 답답하고 왠지 앞날이 불안해졌다. 

남들은 당적을 여러 번 바꾸건만 우리는 긴 무소속 생활에서 여당의원으로 지내오다가 야당으로 당적을 바꾼다는 것이 이렇게 괴롭고 어려운 결단인지 미처 몰랐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은 쉬워도 여당에서 야당으로 가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는 세계적인 정치인 윈스턴 처칠의 당적 이전 전례를 남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처칠도 보수당 의원이었으나 자유당으로 이적을 했다가 1925년에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한 전력이 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업가인 나의 형부는 신한국당에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 당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며 국제의원연맹 선출직을 갖고 있으니 나라망신 시키지 말고 주저할 것 없이 DJ당에 가라고 권유했다. 일본에서 오래 사업을 하신 친정오빠도 한국정당은 노선의 차이가 불분명한󰡐뒤죽박죽󰡑정당이니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선택을 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하기야 한국일보의 장명수 씨는 그의 글에서 한국정당을󰡐비빔밥 정당󰡑이라고 불렀다. 다만 젊은 조카들이 좀 더 신중한 선택을 부탁함으로써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 김윤환 대표와 단 둘이 만난 자리에서 남편이 지역구 불출마 의사를 표명하니까 그 카드는 다음에 써먹을 때가 있으니 지금 내놓지 말라고 하며 전국구 자리는 제한되어서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12월 21일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경제적 이유도 있고 해서 지역구출마를 포기하고 외교에 전념하기 위해 전국구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정식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강 총장은 돈 걱정하지 말고 출마를 하라고 종용했다고 들었다.

그 무렵 이홍구 총리 유임설이 돌더니 갑자기 이수성 씨로 교체되었다. 경제부총리도 5공, 6공 인사는 배제한다더니 나웅배 의원이 낙점되는 등 대통령의 인사원칙이 오락가락하자 언론이 “럭비공, 개구리, YS의 마음, 이 세 가지가 예측불허의 전형”이라는 풍자를 싣기도 했다. 
 
▲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꼬집은 기사 (한겨레신문 1994. 1.10.)

15대 총선이 있던 1996년 초 그이는 더욱 초조해지는 듯이 보였다. 당장 그 해 6월이면 2002년 월드컵 개최지가 결정되는데 국회유치 지원단장을 맡은 뒤 해외출장 한번 못나가고 있었다. 한편 국민회의 후배의원들의 영입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1월 12일 허주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불출마 결심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윤성태 전 보사부 차관을 추천했다고 한다. 허주는 “대통령께 박 의원이 지친 모양이라고 하니까 묵묵부답이더라”며 허주는 “출마하면 당선될 텐데 왜 그러느냐.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인도 불출마에 동의하느냐고 묻더라고 했다. 나도 남편에게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여러 차례 다짐했으나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 그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1월 19일 신한국당 천안 연수원에서 경북 5개 지구당 당직자 교육이 있었다. 김천에서도 160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는 지구당 위원장 부인들도 함께 하는 행사였다. 총선 필승 행사가 끝나고 다과회 자리에서 그이가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불출마 결심을 했다”고 발표하자 모두 어안이 벙벙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이는 아직 젊고, 공천도 문제없고, 당도 출마를 원하며, 열심히 뛰면 당선도 가능하고, 건강도 이상이 없지만, 지역구 출마만이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박정수 의원 때문에 연수원에 왔지 당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니까 다음날 당장 김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또 일부는 “박정수 불출마 결사 반대운동을 전개하자!”고 소리쳐 연수원이 난장판이 되었다.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 나도 같이 울었다. 그중에는 전국구 약속을 받아서 불출마를 발표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 후 김천 유권자들이 여러 대의 버스로 상경해서 신한국당 당사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이로 하여금 다시 출마를 하게 하던지 전국구 의원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당에서는 그 시위를 우리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비난했다는 말에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이는 그러한 자작극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으로 사전에 알았다면 적극 만류했었을 것이다. 

지역구에서는 5선 의원을 만들려고 했는데 왜 출마를 포기하느냐고 아쉬워하고 아까워하는 소리가 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반응이 고맙기는 하나 역시 선거란 돈 없이는 치를 수 없다는 당시의 현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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