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무소속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선거기간에는 양측이 본의 아니게 싸웠으나 박 후보 와의 오랜 관계 때문에 그이는 박 시장이 잘 되기를 바랐다. 경북도지사도 김천시장도 민자당이 패배한 것이다.
그 당시 순복음교회 파견목사 납북사건, 우성호 선원 반환 문제의 해결 없이 대북 쌀 지원을 한데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대단했었다. 하필이면 6.25날에 쌀 2만t을 실은 선박이 동해항을 떠났다. 북한의 요구에 따라 쌀부대도 남한 흔적을 없애려고 흰 포대를 새로 제조해서 사용했다는 뉴스였다.
이때의 소위 Sea Apecs호 사건은 온 국민을 분노케 했다. 태극기 대신에 인공기를 달아야하고 남측선원은 부두에 내리지도 못하고 북한인부들이 우리선박에서 쌀을 하적한다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퍼주고 뺨맞는 격’이라는 비난이 비등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바로 그 이틀 후였으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북 쌀 지원 중단 이후 북한의 사과로 다시 그 해 8월 11일 삼선 비너스호로 남은 쌀을 보냈다. 그러나 북한이 그 배의 이양천 1등 항해사가 청진항을 촬영했다며 계획적 정탐행위라고 억류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고 13일에야 풀려나옴으로써 15만 t의 쌀 지원 약속을 이행할 수가 있었다.
이 와중에 우리는 “지역구에서 손을 떼자”는 말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하게 되었다. 그이를 열렬히 지지한 유권자 가운데 지금은 고인이 된 최시한 사장이 지구당 사무실에 가끔 들려 시끄러운 일들로 시달리는 그이를 보면서 여러 번 한 말이 있다. “김천사람들이 박 의원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기분 같아서는 그만 서울로 가버리시라고 하고 싶다”고. 그런데 최 사장의 그 말을 따를 때가 온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참 선거운동이 진행될 때 고인이 된 전제두 장로의 막내딸 결혼식에서 그이가 아버지 대신 신부를 데리고 들어갔다. 딸을 뇌암으로 잃고 자기는 그럴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친구 딸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죽은 딸 생각에, 전 장로 생각에, 눈물을 참느라고 힘이 들었다고 했다.
전제두 장로는 보기 드물게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선거 때마다 우리를 위해 성심성의껏 뛰어준 분이다. 전 장로가 작고했을 때 그이는 “내 오른팔이 떨어졌으니 앞으로가 막막하다”며 몹시 슬퍼했다.
시장선거가 있던 해 12월 말 나도 방학이어서 남편 따라 선거구에 내려가서 일주일간 지역구민을 만나고 귀경했다. 박정수 의원이 5선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깝다며 돈만 있으면 다른 대타가 없으니 15대 총선도 꼭 당선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한결 같이 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들 것 같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YS정권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커진 많은 유권자들은 앞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부녀회장들을 만난 후 지구당 사무실에 가보니 청탁을 하러온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들이 군에서 4회에 걸쳐 남을 폭행했다며 찾아온 부모, 폭력 강도로 체포된 자식을 무죄로 만들어 달라는 어머니, 취직부탁, 경사에서 사무관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부탁 등.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이는 “돈 때문에라도 지역구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임기 4년인 IPU 집행위원자리를 어떻게 유지하느냐”라며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가 조선호텔 앞을 지나가는데 전 국회의원 한분이 연세가 꽤 들었는데 택시를 잡으려고 젊은이들 틈에 끼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번에 출마를 하면 있는 재산 다 날리고 그렇게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출마포기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서울역에 마중 나온 아들과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마치 생전 그런 느낌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처럼 그 순간을 마음껏 음미했다.
이날 김상현 의원이 우리를 보고 자기가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박 의원을 국민회의로 모시고 간다”고 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했다며 껄껄 웃으며 지나갔다.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묻지 않았다.
김천에서는 다음 총선에 정해창 전 법무장관, 윤성태 전 보사부차관, 임인배 씨, 배병휴 씨 등이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치 남의 지역구 이야기같이 들렸다. 시장선거를 치른 후 그이의 체중이 4kg 줄었다.
다섯 번에 걸쳐 그 어려운 선거를 치르면서 온갖 중상모략도 극복해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우리의 참모로 일 해온 박시장이 당선된 것은 다행이지만 후보 선정과 선거 과정이 자기 뜻과는 너무나도 빗나간데 대해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다. 또 60세가 넘고 보니 스트레스 저항력도 저하되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