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구호와 충성론 (79회)
  제11장 문민정부의 시국에서

구호뿐인 세계화

문민정부 수립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말을 한 후 모두 알아서 골프장 출입을 삼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골프를 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주돈식 대변인이 YS가 그런 현상에 “진노했고” 따라서 청와대 직원들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넌센스”적인 발표가 있었다.

당시 언론만평에서는 집안어른이 “나는 밥을 먹기 싫으니 너희들 모두 먹지 말아라”라는 내용으로 YS의 소위 골프 정책을 비꼬았다. 국제화를 외치는 대통령답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인들이 호텔방을 빌려서 고스톱 치는 것 보다는 골프장에 가서 건강 관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본분을 잃고 내기를 한다든지 향응을 받는 골프를 우려해서 대통령이 금지령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좀 더 세련된 방법을 택했으면 좋을 뻔 했다.

1994년 3월 파리에서 IPU 총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5, 6 공화국 때 한국대표들이 부인들을 동반하게 되면서 북한만이 부인을 동반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그들은 무척 우리가 부러웠을 줄 안다. 그래서 파리에 따라갈 계획으로 보강도 다 해놓았다. 그런데 민주계의 강인섭 의원이 청와대 허락을 맡아야 한다며 알아보더니 부부동반은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혹시 남편한테 불이익이 될 것 같아서 나도 따라갈 계획을 포기했다. 세계화, 국제화를 부르짖으며 청와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그 반대의 길로 나가는데 대해 불만이 컸다.

JP의 충성론과 남편의 평

1994년초, 김영삼 대통령이 연두회견을 통해 전당대회를 연기하고 김종필 대표 체제를 유지한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김종필 민자당대표는 “높은 사람이 인정해주면 목숨을 바치며 충성을 다하게 된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며칠간 언론의 가십꺼리가 되었고 사설에서까지 다루어졌다.

그런데 1월 13일 남편이 출근한 후 동아일보를 열어보니 김동철 기자가 쓴 박스기사에 민자당 당무회의에서 JP충성론에 대한 남편의 논평이 실려 있었다. 다음은 동아일보 기사내용이다.
 
▲ 동아일보 (1. 13.) JP충성론에 대한 박정수 의원의 논평기사

「새해 초부터 세간의 화제가 됐던 민자당 김종필 대표의 충성론이 당내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12일 오전 민자당 당무회의 자유토론시간. 두 번째 발언에 나선 박정수 의원이 충성론을 들고 나왔다. “충성론을 둘러싸고 말이 무성하다. 인정을 받을 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민정 민주 공화계라 하지만 인정을 받으면 충성 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 의원은 이어 충성을 “맹목적 감정적 충성”과 “이성적 합리적 충성”으로 분류해 5분여 동안 설명했다.

「맹목적 감정적 충성의 부류는 열성적 적극적이어서 위정자의 신임을 얻기 쉽다. 문제는 이들이 동물적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라서 이해관계에 따라 충성이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위치 고수를 위해 교묘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위정자에 접근하는 기회를 봉쇄한다. 이들이 기승을 부릴수록 위정자나 당은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마련이다.“

김 대표의 표정은 약간 상기됐다. 당무위원들도 구체적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회의장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박 의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부류인 이성적 합리적 충성론에 대해 설명했다. “이들은 위정자가 무엇을 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인가를 판단해 고언도 서슴치 않는다” 그는 여기서 본론에 들어갔다. “김 대표의 말씀은 이런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왈가왈부하는 게 아닌가”

그는 “첫 번째 부류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시절 말기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 부류의 충성도를 높게 사도록 대표가 (대통령에게) 전언해 달라”고 덧붙였다. 박 의원의 의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회의 말미에 김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그 문제 (충성론)를 언급한 것은 왕조시대의 발상은 아니다. 상호 인간관계의 도리에서 받들 것은 받들자는 얘기였다. 사설들을 쓰고 하는데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 당 차원에서 정성을 모아 국정목표를 완수해 나가자」 김동철 기자

그 이후 그이는 외교에만 관심이 있는 박력 없는 신사 이미지였는데 의외로 대담하다는 코멘트를 들었다고 한다. 김 기자가 박 의원의 의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고 썼는데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내 추측으로는 민주계의 그에 대한 편견과 견제로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월 23일 민자당 주최로 ‘한국의 정치선진화’에 대한 대 토론회에 그이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외국어 대학의 김계수 교수의 주제발표가 있은 후 그이가 두 가지를 지적했다고 한다. 1) 다수결 원칙의 실현으로 과거 소수의 극한투쟁과 날치기 통과를 없애자는 것. 2)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민주화가 필요하다. 당무회의나 의원총회에서 윗분을 의식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

그 밖에 공무원의 복지부동, 기업의 위축이 지양되어야 한국정치가 선진화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들었다.
 
▲ JP충성론에 대한 매일경제 칼럼 (1994. 1.13.)

다음날 신문마다 거두절미하고 당무회의에서 윗분 눈치 보느라고 토론도 제대로 못한다는 발언만이 부각되었다. 결국 민주계의 문정수 사무총장이 확인도 하지 않고 “박 의원이 당내에서는 발언도 하지 않다가 밖에서 왜 그런 소리를 했느냐” “누가 말하지 말라고 했느냐”는 등 마구 비난을 하자 서청원 제1정무장관이 “그분은 평소에 옳은 말을 많이 하는 분”이라고 하여 입을 다물었다는 내용이 신문 가십난에 나왔다.

본인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발언 전부를 몰라서 오해를 한 모양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만 했다. 그야말로 사무총장 스스로가 당내 민주화의 부재를 증명한 셈이라는 생각을 했다.

점점 그이는 민주계 의원들의 미움만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일 때문인지 그 해 봄 이한동 총무에 의하면 당이 그이를 외무위원장으로 올렸는데 난데없이 경제통인 나웅배 의원 이름이 내려와서 꽤 힘이 ‘쎈’ 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JP 탈당 전후의 일

충성론이 나온 지 1년 만에 JP가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한다는 루머가 퍼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이의 조카 며느리가 전화를 했다. 자기 남동생(YS의 맏사위)이 우리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바빠질 것 같으며, 외국 사람들도 많이 알고 발도 넓은 것을 알고 있으니 JP 측근들과는 말도 하지 말고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이가 JP를 따라서 탈당할 가능성이 있을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당, 저 당으로 이적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그이는 민자당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1995년 2월 JP가 탈당을 했고 이어서 남편의 생일인 2월 9일 국제화추진위원장으로 임명이 되어 당 12역에 포함이 되었다. 이때 언론마다 ‘매너 깨끗한 외교통,’ ‘세련된 매너, 대인관계 국제신사,’ ‘교수출신의 깔끔한 외교통,’ ‘미국박사의 매너 좋은 외교통’ 등으로 좋은 평가를 해주어서 기뻤다. 다음은 한국일보에 나온 그에 대한 평이다.

학자출신의 4선외교통 / 박정수 세계화추진위장
부드러운 성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당내에서 신사로 통하는 학자출신의 4선 의원. IPU대표로 활약하는 등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표적인 외교통이다.」

겨우 그 자리를 주면서 생색을 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나 혼자 했지만 겉으로는 “당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해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가 있었고 그이는 경북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시간을 많이 뺏겼다.

YS 정권 중반기에 당정 인사가 단행될 때 그이는 또 당에서 정책위의장 후보로 올렸으나 충청도에서 창립된 JP를 의식해서인지 이춘구 의원이 임명되었다. 또 김윤환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되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는 국제화추진 위원장직을 정재문 의원으로 교체했다. 

결국 JP한테 못 가게 하기 위해 잠시 맡겼던 자리라는 것이 증명되어서 뒷맛이 씁쓸했다. 부도덕한 행위같이 느껴졌지만 그이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이때 나웅배 외무위원장은 8개월 만에 통일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경제통이면서도 외무위원장, 통일부장관등으로 발탁되는 것을 보고 YS의 신임이 무척 두터운 분으로 짐작했다.

당시 나는 통일부의 교육홍보위원장이었다. 회의가 있던 날 나웅배 장관실에 들려 축하인사를 하니까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박 의원님이 오셔야 하는데”라는 것이다. 의외로 겸손하게 대해준 나 장관에 놀랐다. 그 후부터 그분의 신사적 매너와 인상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김윤환 의원이 당 대표가 됨으로서 공석이 된 경북도당 위원장직을 그이가 맡게 되었다. 이렇게 그이는 늘 당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95년 10월 정치부 기자, 피감독기관, 공무원, 보좌관들이 뽑은 국정감사 상임위원회별 베스트 5에 그이가 외무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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