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 후 조문파동과 이념적 분열 (78회)
  제11장 문민정부의 시국에서

1994년 3월 19일 남북실무 접촉회의에서 북한의 박영수 대표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공갈해서 우리사회는 한때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이때 국회에서 이부영, 이우정, 남궁진 의원들이 그러한 발언 장면을 왜 방영해서 위기의식을 조장하느냐”고 비난을 하자 모 신문사설에서 “옆집애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면 의례히 부모나 가족한테 알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국민에 알릴 권리를 부르짖더니 이젠 알렸다고 시비하느냐.... ”고 반박을 하는 등 시끄러웠다.

그 해 6월 18일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자진해서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고 서울에 왔다. 그는 김일성을 “정직하고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예찬을 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두 갈래였다. 50년간 당해 온 우리가 더 잘 아는데 불과 8-10시간 만나고 온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 혹시 김일성에 놀아난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는가 하면, 카터를 평화의 사도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여간 카터를 통해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7월 25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해 왔다. 우리정부는 즉시 수락했고 실무자 간의 준비회의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과연 YS가 몇 수 위인 김일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실수라도 하면 어쩌냐는 등 마치 가족의 일원이 시험이나 치르러 가는 기분들이었다.

1994년 7월 9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JP 손녀딸 돌잔치에 초대받아 청구동 댁으로 갔을 때였다. 사모님 여동생이 들어오면서 “김일성이 죽었대!”라고 외쳤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옛날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누군가가 TV를 켰다.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50년간 독재정치에 200만 동족을 살상한 피의 지도자,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독재자가 82세에 생을 마쳤다고 대서특필 했다.

국민 모두가 며칠을 TV앞에서 지새웠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TV의 아나운서와 대담 출연자들이 김일성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사실이다. 그 전에 우리는 주석 호칭을 쓰지 않았다. 북한은 여전히 우리 지도자들에 대한 예우를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세상이 변한 듯 깍듯이 김일성주석, 김정일 위원장으로 예우를 하고 있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왜 하나님은 김일성 같은 인간에게 33세에서 82세까지 권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하고 마지막에는 미국과 한국에 유화 제스처를 보인 후 고통 없이 운명할 수 있는 행운을 주었을까? 솔직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김일성의 사망을 소망하지 않은 사람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이 우리에게 후련한 마음보다는 한반도 평화로 이어질지 모를 정상회담에 대한 희망을 깨트린데 대해 아쉬운 감정이 짙었던 것도 사실이다.

막상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니, 아들 김정일은 아버지보다 성품이 포악하다는데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TV 출연자들은 각각 미래를 점치는 역학자들처럼 온갖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김일성의 죽음은 자연사냐 타살이냐? 조문객을 왜 사양하느냐? 성스럽다는 시체에 왜 칼을 대고 해부를 했느냐? 김정일 체제가 출범할 것이냐? 얼마나 지속되겠느냐? 등등이 매스컴의 이슈들이었다.

김일성 사망을 애도하는 북한 주민들의 울부짖음은 마치 교주(敎主) 사망 후의 광신도들이 몸부림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TV를 보던 나는 그런 모습에 기가 막히다 못해 그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면에 걸린 집단 히스테리를 보는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 평양 주석궁에서 한국대표 단장인 남편과 김일성 주석의 건배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역사의 시계바늘을 정지시킨 채 최면술에 걸린 북한 인민들의 광적인 모습....... 앞으로 좀 달라질까? 하다가도 왠지 길들여진 북한주민은 계속 김정일을 믿고 꼭 같은 사고의 틀 속에서 살아갈 것만 같았다. 한편 그 이는 “앞으로 북한은 탈냉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중국식 혹은 베트남식 개방과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보다 낙관론을 폈다.

7월 10일 우리는 전철우, 장영철, 한승호등 동우회(東友會) 소속 탈북 학생들을 힐튼호텔 뷔페식당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살고 있을 때는 김일성을 신 이상으로 여겼고 멀리서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김일성 사후에도 북한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점쳤다. 
 
그 날  한승호 군이 다른 학생들은 두 명씩 망명을 했는데 자기는 단독망명 케이스여서 안기부에서 곤욕을 치렀으며 그때는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는 말을 했을 때 자식을 가진 부모입장에서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지금쯤 부모님은 자식이 남한에서 잘 먹고 살아가는데 대해 안심하고 계실 것이라고 했다. 남한으로 오기 전부터 남한이 잘 산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세 학생들이 모두 통일이 되면 부모님과 동생들을 뒷바라지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번득였다.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민족의 비애를 피부로 느꼈다. 어떤 학생은 외국에 가보고 싶어도 출국 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애태우기도 했다. 지금쯤은 출국이 자유로워졌기를 바란다.

7월 12일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이부영, 이우정, 남궁진, 임채정 의원들이 북한에 조문사절단을 보내자는 발언을 함으로써 이 문제가 이념분쟁으로 비화되었다. 반대 측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책임자들을 끈질기게 추궁하던 사람들이 200만(500만?) 동족을 살상한 민족의 역적에 대해 어찌 그리도 관대할 수 있느냐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러자 “동양적 미덕도 모르는 냉전적 사고”라고 반대파를 매도했다. 그때부터 이미 냉전적 사고라는 용어가 유행된 것이다.

조문파동으로 인한 사회분위기는 양분화 되어갔다. 박홍 서강대 총장이 청와대 총장회식에서 “한총련의 배후는 김정일”이라고 발언한 내용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다수가 박 총장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였으나 KNCC, 카톨릭 정의사제단에서는 그의 발언을 “무지의 폭력”이라고 맹공했고 민주당은 증거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이 논란에 이대용 전 월남공사가 가세해서 호지명 사망 후의 월남사회가 우리와 꼭 같았다고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호지명이 사망한 후 조문사절단을 보내라는 국회의원, 학생회장등은 후일 월맹의 프락치로 증명되었고 통일 후 월맹에 대한 유화론을 주장한 신부, 국민당 당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두 처형당했다는 무서운 내용이었다. 

김일성 분향소를 만들고 북한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학생들의 행동 때문에 박 총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젊은 혈기에 탈선은 있을 수 있으나 북한의 인민들을 노예화시킨 김일성 부자를 흠모한다는 것은 백보 양보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문민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된 과격시위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1994년 2월 전국 농민대회에서 우루과이 라운드(UR) 비준 반대 가두시위는 가장 격렬했던 시위였다.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이 등장하여 60여명의 전경이 중경상을 입고 한명은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이에 교수들은 순수한 농민들이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분명히 불순세력이 가세한 것이 아니냐고 나라 걱정을 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북한 지도자라면 남한의 이러한 시위를 볼 때 가만히 있어도 남한은 붕괴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1993년 6월 14일 KBS 미국 특파원의 보도가 생각났다. 미국에서는 화염병을 사용하는 학생은 이미 학생이 아닌 폭도로 간주하고 경찰은 실탄으로 방어를 할 수 있는 법조항이 있다는 것이다. 죽을 각오가 있을 때 그런 방식의 시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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