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김 장관이 이미 ‘인가불가’ 결재를 했고 총리결재도 끝났다고 하는 말을 이성호 실장을 통해 듣고 남편은 너무나 실망했다. 그렇게 실망하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순간 코끝이 찡해왔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그이의 어릴 적 친구인 전영철 씨와 조철화 씨 내외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김천 대학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전영철 씨의 부인인 문수재 연세대교수가 이성호 실장을 잘 안다며 그 이는 김란수 광주대학 총장과 가장 가까운 스승 제자 관계라고 귀띔해주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위의 압력 때문인 것도 모르고 계속 이성호 실장만 겨냥해서 로비를 한 것이다.
김란수 총장은 또 우리와 전혀 인연이 없는 분이 아니었다. 그분의 아들이 죽은 우리 딸과 이대부속국민하교 같은 학년이었는데 우리 아이보다 먼저 천국으로 갔다. 다급해진 남편은 그 분한테까지 부탁을 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대학 건으로 우울한 하루를 보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루머에 의하면 누구는 대통령의 아들과 가까워서, 누구는 가신의 부인과 친해서, 누구는 부인이 술 담그는 솜씨가 좋아서 등 소문이 요란했다. 나는 그런 내조능력이 없어서 남편한테 그저 미안했다. 다른 부인들처럼 재테크 소질도 없고, 남편의 출세를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 아첨할 줄도 모르고, 그저 교과서적으로 고지식하게 살다보니 한국적인 정치풍토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슬퍼질 때가 있었다.
싫다는 남편을 설득해서 26일에 우리가 전에 살던 대신동의 김 장관 댁을 방문했다. 딸아이가 뛰어다니던 동네여서 옛날 생각에 젖어오는 눈을 닦으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듣더니 “어쩐지 24일 목요일에 그 안건을 서명하라고 재촉을 하기에 살펴보면서 박정수. 이범준 박사 부부가 하는 일이면 좋은 일일 텐데 왜 안 되느냐고 물으니 재단이 부실하고 학교 브로커라고 해서 일단 집으로 서류를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청와대 교육 수석실에서 독촉이 와서 할 수 없이 부결시키는 결재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목요일에 그이가 장관과의 통화를 위해 비서실장에게 연락을 하니 업무 브리핑 중에는 전화를 받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국회의원 전화까지 받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하며 미안해했다. 그날만 통화가 되었어도 조건부 인가가 가능했을 텐데 행운이 우리 옆을 피해 간 셈이다.
그이는 다음날 당장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TV 앞에서 고구마를 먹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4년제 대학유치에 실패하면 15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말자” “국회의원이 아니면 당신은 할 일이 없을까?” “왜 없어. 얼마든지 있지.”라고 그이는 순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고구마를 먹으며 TV화면을 보면서도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팔자타령이 절로 났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순탄하게 얻은 것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귀국 후 차관으로 내정이 되었는데 밤사이에 교체되는 경험으로 우리의 좌절은 시작되었다. 10대에서 14대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힘겹게 그이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무소속으로 출마를 했다. 공천복도 없었다. 김선길 의원이 충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실패하자 그이에게 어떻게 무소속으로 세 번이나 선거를 치렀느냐며 감복할 정도로 무소속 후보로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외무위원장직도 사전약속을 받고도 2년간 기다려야 했고, 전임자는 4년 임기를 채웠지만 그이는 YS 측근 때문에 2년으로 마쳐야 했다.
4년제 대학유치 문제는 이렇게 해서 또 한해를 기다려야 했다. 1994년 8월경 대구재단 이사장이 자기가 청와대 인사를 만났더니 박정수 의원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이라고 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어느 토론회에서 그이가 당의 민주화문제를 논한 것을 가지고 당시 민주계의 문정수 사무총장이 문제를 삼은 해프닝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교육부 실무자들이 서류를 끼고 앉아서 올리지 않고 있으니 속히 위에서 서류를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게 해야 한다고 교육부 내부사정을 잘 아는 분이 귀띔을 해주었다. 그 결과 김숙희 장관이 무조건 서류를 올리라는 지시를 했고 11월18일 김 장관이 4년제 대학 인가를 결재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합대학이 아니라 보건대학으로 승인이 나서 김천시민들의 반응이 걱정스러웠다. 김 장관은 교수진을 실력자로 충원하도록 신경 써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남편이 근 2년간 그렇게 힘겹게 로비를 했는데 보좌관이 청와대가 결재를 마쳤다는 소식을 재단에 전하니까 김 이사장이 자기 부인이 “손명순 여사에게 부탁한 덕분에 가능했다” “김숙희 장관은 이번 일에 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귀를 의심할 정도로 기막힌 말 이었다.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이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앞으로 대학이나 정직하게 운영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하고 말았다. 그이다운 반응이었다. 사람이란 모두 우리 같지 않다는 것을 짐작은 했지만 이럴 수가! 그 후 김 이사장과의 관계가 끊겼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이 일이 다 끝난 후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의 조카뻘 된다는 사람이 그이를 의원회관으로 찾아왔다. 김천 4년제 대학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가운데 그동안의 결정적인 방해 요인을 알게 된 그이는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어 했다.
그이는 대결을 혐오하는 성품이어서 이미 엎질러진 물인 만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 내용은 여기서 밝힐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