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댁 방문 (6...

몰타총리 에피소드

그이가 외무위원장으로 피선 된 후의 일이었다. 강영훈 총리 공관에서 몰타 (Malta) 총리내외를 위한 만찬에 외무위원장 부부 자격으로 참석을 했다. 몰타라는 작은 나라는 씨씰리 섬과 아프리카 사이에 있는 전 영국식민지로서 1964년에 독립국가가 된 나라이다. 바로 몰타에서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만나 얄타회담 이후의 냉전체제를 정식으로 종식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몰타가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한 국가라고 해서 정중한 대접을 했던 것이다. 만찬행사에서 식사가 나오는데 전체 요리로 소위 슈림프 칵테일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새우를 놓은 접시에는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된 먹음직하게 생긴 예쁜 드라이아이스가 윗부분에 놓여있었다.

요리를 먹고 있는데 최호중 외무장관 부인이 내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몰타 총리의 귀와 코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긴장되었다. 최 장관은 적은 목소리로 부인에게 “웃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 드라이아이스를 먹은 것이다. 몰타 총리부인은 아주 침착하게 맞은편에서 자기 남편을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면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다.

드라이아이스는 많이 먹으면 식도가 상한다고 들어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의사를 그들이 머물렀던 신라호텔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이상 없이 끝이 났다고 듣고 안심했다. 만일 여러 개의 드라이아이스를 먹고 몰타 총리가 한국에서 사망 혹은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전 세계로 나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슬아슬한 해프닝이였다.

김재규 부장 댁 방문

1989년 1월 9일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우울한 날이었다. 성신여대 연구실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보문동의 김재규 부장 사모님을 뵈러 갔다. 근 10년 만에 가는 발길이어서 한참 골목을 헤매야 했다. 겨우 찾은 한옥 집은 10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문 앞에서 나이 든 운전기사가 내 이름을 듣더니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동안 그 기사 아저씨도 변했고 나도 변해서인지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10여 년 전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앉아서 담소하던 현관 옆 작은 응접실에서 5분간 기다렸다. 그 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훈장을 달고 칼을 찬 김 장군의 초상화만이 새롭게 벽에 걸려 있었다. 옛일들을 더듬으며 착잡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사모님이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당장 쏟아질 듯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두 손을 맞잡고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내가 아는 사모님은 무척 조용하고 말씀이 없는 온화한 분이다. 외모에서도 그러한 성품이 풍겨 나온다. 우리가 방문할 때도 차 대접만 하고는 배석을 안 한 분이었다.

▲ 시해사건 현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던 순간을 현장검증 재현하고 있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

진작 찾아뵙지 못한데 대한 사과부터 드렸다. 9년 전 사모님의 여동생이 우리 아파트에 와서 미국대사에게 부탁해서 사형만이라도 면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하소연한 일이 있다. 그래서 남편이 은밀하게 사방에 알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당시 우리도 쫓기는 신세였고, 김 부장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변명 한 마디 못하던 때여서 전혀 도움이 못 된 채 가슴만 태웠다는 말씀을 전했다. 사모님은 그런 줄을 몰랐다면서 “누구를 미워할 생각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79년 10월 23일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L.A.에 있으면서 그 사건을 방송을 통해 듣고 허둥대던 일, 그리고 그 다음날 밤 나의 꿈 이야기도 해드렸다. 넥타이 정장을 한 남자들이 버스에 올라탄 후 의자에 앉는데 김 부장만 한복을 입고 의자 사이 통로에 앉는 꿈이었다.

사모님은 “그분이 사표를 써갖고 다녔는데 왜 그런 일을 하셨는지…” “늘 일기를 기록했는데 당국에서 집을 수색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가 모두 태워버렸다”며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당시 사모님은 실신하여 병원에 가고 없어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3일전 아침 김 부장이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할지 소의를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할 때 자기는 당연히 남자가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하들의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말했다. 당시 처형된 부하의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는 대목에서 사모님은 한없이 울었다. 사모님도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그때 “내 남편이 이런 곳에서 일을 했다니” 하는 생각과 함께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후 디스크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사모님의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김 부장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외동딸은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그 댁을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퍽이나 무거웠다. 갑자기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다.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모두 그분의 운명이고 나의 팔자지요. 언젠가 진실은 하나님께서 밝혀 주시겠지요.” “많은 군 장성들이 자기들과 사전에 의논을 했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더라”고 한 사모님의 말씀이 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 장군이 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사모님이 극구 반대한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외출을 전혀 안하고 지내온 지난 10년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무렵에도 여전히 바깥출입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김 부장은 우락부락하고 엄하게 생긴 분이지만 나에겐 늘 따뜻하고 자상했고, 불의를 못 보며 거짓말을 못하는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남편이 선거운동에 열중하고 있어 내가 주로 김 부장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울리고 때로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케 하던 그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입으로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던 분들 (lip service)과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