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3년 만에 찾아온 조국은 무척 많이 변해 있었다. 6・25 전쟁 중에 부산에서 배 타고 유학을 떠날 때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외형적인 모습이 거의 재건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성위주 사회풍조는 여전했다. 새로운 우리 생활에서 아이들에게는 화장실이 제일 문제였고 나에게는 남편의 늦은 귀가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영어만 쓰는 손자 손녀와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영어 채널을 못 틀게 하고 한국방송만 듣게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우리말을 6개월 만에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남편과 가까운 노정현 연대 행정학과 교수와 함께 연세 교수들에게 분양한 이대 후문 쪽의 봉원동 땅을 얻어서 그 댁과 우리는 앞뒤로 집을 지었다. 70년대 초, 우리 네 식구와 시부모님 그리고 가정부 모두 일곱 식구가 입주를 하게 되었다. 100평이 안 되는 대지에 70평 되는 이층집을 지었는데 지대가 높아서 지하 2층으로 파야 했기 때문에 축대가 무척 높아졌다.
정일권 총리가 하루는 그이를 부르더니 누군가가 축대 높은 우리 집 사진을 그럴듯하게 찍어서 공무원이 호화주택에서 산다고 청와대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 총리는 우리 집에 와서 보고 가셨기 때문에 그것이 모략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에서 살려면 이런 일이 허다하니 각오하라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노정현 박사와 그이가 친하게 된 계기는 잘 모르지만 고대 출신인 노 박사를 연대에 오게 하기 위해 그이가 당시 박대선 연대총장에게 부탁을 한 사실은 알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마다 본교 출신만을 채용하는 추세였다. 그이가 늘 박 총장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때 이미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는 데 있었다. 타 대학 출신도 연대에 채용하는 전례를 만드는 첫 총장님이 되시라고 했더니 흔쾌히 노 박사를 스카우트했다는 것이다. 실력 있고 온화한 인품을 가진 노 박사는 연세대에서 보직을 두루 거친 후 은퇴하셨다.
귀국 직후 한동안 주변변화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생활이 그들 나름대로 불편했는지 아니면 임시로 방문하러 온 줄 알았는지 우리만 보면 “When are we going back home?"(언제 집으로 가느냐) 하며 졸라댔다. 그러나 새 집을 짓고 이사 간 후는 화장실 문제가 해결되었고 다니는 학교도 가까워져서 적응이 빨랐다. 나는 나대로 한국의 남성위주 문화에 짜증이 나서 부부간의 갈등도 잦아졌다. 그뿐 아니라 13년간 미국식 민주주의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한국의 정치, 사회풍토는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부부 정치학박사라는 점 때문인지 우리 내외는 매스컴의 관심을 많이 끌었고 여기저기에서 원고청탁이 쇄도했다. 그이도 나도 주요 일간지의 고정 컬럼 란에 글쓰기에 바빴다. 다행히 10여년 만에 귀국한 고국이어서인지 우리에게는 글 쓸 소재가 풍부했다. 두 사람 다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났다가 30대초에 돌아와서 접하게 된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나는 화장실 문화부터 시작해서 남성위주 사회에 대한 불만, 비민주적 요인 등 많은 문제점에 관해서 글을 썼다. “여자는 부재중”이라는 연속극이 인기였을 때 나는 “남성은 부재중”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썼고, 요정정치의 부당성과 부작용에 관한 글도 수 없이 기고를 했다. 제한된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겁 없이 쓸 때마다 남편은 정일권 총리의 호출을 받아서 “부인 하나 통제가 안 되느냐?”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이화여대 연구실에 김정례 씨(전 보사부장관)가 나를 찾아왔다. 첫 대면이지만 씩씩하고 품위가 있는, 정의와 의리의 여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 분의 그런 믿음직한 인품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찾아온 목적이 또한 미국유학시절에 내가 부러워했던 여성유권자연맹을 한국에도 조직해보자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귀국 전에 뉴욕의 여성유권자연맹 본부를 방문해서 자료도 받아온 일이 있었기에 너무나도 반가워서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황신덕 씨(중앙학원 이사장), 최이권 씨(YWCA 회장), 김정례 씨(후일 보사부장관), 이태영 씨(전 이대법정대학 학장), 김미희 씨(고 공화당 김성곤 의원 사모님) 그리고 나, 5명이 한국 여성유권자연맹 창립 발기인이 되었고 서울 YWCA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김정례 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미국의 여성유권자연맹처럼 우리도 정치적 중립단체로 활동을 하되 제일 먼저 전국을 순회하면서 여성유권자들에게 투표를 통한 주권행사의 의미를 계몽하고 의식화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미희 씨와 나는 남편들을 통해서 정부의 압력이 들어와 끝까지 참여가 어려웠다. 정보부에서 재야의 김정례 씨와 이태영 씨를 믿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소지가 있다며 끈질기게 감시하고 그런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국방대학원의 초청을 받아서 나의 논문 주제였던 말라야 공산 게릴라 전략전술에 관하여 4시간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월남 전쟁 때 사령관으로 계시던 이범준 장군인줄 알았는지 “여자다! 여자다!”라고 수군거렸다. 국방대학원이 창설된 이래 박순천 여사 외에 내가 두 번째 여성강사로 초청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그 시대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드물 때였다.
귀국직후 박사학위 논문을 「말라야 공산게릴라전 연구」라는 제목으로 고대 아시아문제 연구소 출판부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군사용어를 번역하는 데 당시 군사전문가이며 경희대학 교수인 김점곤 박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중앙정보부 학원담당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종로의 한 다방으로 나갔다. 내 책이 금지 도서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부록에 실린 말라야공산당 강령 때문이라고 해서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국대학에서 허용된 논문인데 같은 우방국인 한국에서 금지가 되다니…. 이것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말해 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