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의 관계와 당원들과의 단합대회 (77회)
  제10장 성신여대 교수시절과 남편의 활동

종교계와의 관계

매해 초파일이면 지역구내의 사찰을 방문하고 시주를 한다. 그러면 그이 이름으로 등을 달아 주었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교인인 박 의원이 절 행사에 참석했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어떤 분은 직접 사찰행사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기독교인이나, 불교도를 막론하고 지역민 전체의 대변인으로 선출된 사람이라고 설득을 하고 양쪽 종교행사에 다 참석했다. 사찰에 가면 합장은 하지 않고 가볍게 머리 숙여 절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렇게 지역구민들을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지역구에는 사찰이 많아서 사찰로 들어가는 도로포장이 절실한 숙원사업이었다. 그이의 각별한 노력으로 거의 모든 진입로를 포장할 수 있었다. 선거 때면 박정수 후보가 교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교계가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었으니 그이는 행운아였다.

원래 우리의 지지기반은 교회였다. 선거 때면 12대 선거를 제외하고 모든 교회가 적극적으로 그이를 지지해 주었고 지금도 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불교신도들도, 성당신도들도 그이를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지금은 선거법이 과거의 많은 폐단을 시정해서 지역구 관리가 수월해졌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당시는 그저 돈이 드는 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몇 백 개 되는 교회에 헌금을 보냈고 초파일이면 각 사찰에 시주를 해왔다.
 
어느 해인가 한 교회에서 헌금 액수를 늘리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받는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보내는 사람은 몇 백 교회에 소요되는 경비가 어마어마한 액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깨끗한 정치인이 되라고 하면서도 많은 기부금을 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늘 선거 때 “박정수는 자격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파이야”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도 다른 후보만큼 돈을 쓰지 않고도 무소속으로 두 번, 여당으로 두 번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성당, 불교신도와 동문들, 침묵하는 다수의 순수한 지지 때문이라고 믿는다.
 
▲ 직지사 오녹원 스님 등과 함께

당원들과의 등산과 불결한 화장실

1994년 11월 25일 1500명 당원들이 34대의 버스로 청송 주왕산으로 향했다. 버스마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잔득 싣고 산행을 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34대의 버스가 뱀처럼 구불구불 산을 따라가는 것이 장관이었다.

사실 그이가 국회의원이 된 후 이 산행이 처음이고 마지막 행사가 되었다. 당원들이 그 전부터 이런 단체 산행을 원했지만 경제적 부담이 워낙 커서 엄두를 못 내다가 처음으로 시도를 했는데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그이가 주말마다 지역구에 내려 갈 때면 돈이 필요하듯 이런 대규모 행사를 하는 데는 엄청난 경비가 들기 때문에 당원들의 등산 행을 자주 갖는 다른 지역구 형편이 부러웠다.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모두 버스 안에서 노래자랑도 하고 재미있는 만담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물론 관광버스에서 흔히 벌어지는 춤은 추지 않았다. 주왕산을 처음 가본 내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당원들이 즐거워했다는 것, 그 곳의 공중화장실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불결했다는 것이다. 사용한 휴지들이 사방에 널려있고 코를 찌르는 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발을 디딜 공간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평소에 남편 따라 경부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릴 때면 냄새가 진동하던 때가 있었다.

남편과 같이 새마을호를 타고 김천으로 내려갈 때면 나는 아침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 기차안의 화장실이 너무 불결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어느 날 한국으로 수학여행 온 일본 고등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줄 알고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토할 것 같다”며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막는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관광공사 사장과 철도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우선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 등 전국의 공중화장실을 청결하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호소와 새마을호의 화장실 청결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몇 달 후에 관광공사의 한 하부공무원이 보낸 공문에 ‘앞으로 화장실을 더 많이 세울 계획이며....’ 동떨어진 내용이어서 기권해 버렸다. 그러나 얼마 후 최홍 철도청장이 94년 2월 28일 직접 전화를 해 열차화장실 청결을 위해 승무원을 지정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3월경에는 전국적인 화장실 문화운동의 발기인이 되어달라는 청을 했다. 그래서 한동안 열차화장실에 꽃 한송이가 꽂힌 화병도 비치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 달 안 되어서 최 청장이 지하철 노조파업을 책임지고 사퇴를 하고 말았다. 열차 화장실은 도루아미 타불이 되었다. 최 청장의 경질을 무척 아쉬워했다.

실은 1965년 귀국 후 화장실 청결을 혼자 줄기차게 외쳐왔지만 그 누구도 호응을 안했으나 최 청장의 적극적인 동조에 고무되었었는데.... 방송국에도 여러 번 선진국형 화장실 문화에 관한 토론을 건의했으나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다. 

열차화장실은 악취뿐만이 아니었다. 물을 내리면 때로는 물 대신 소변이 올라 올 때도 있어서 비위가 약한 나는 토하기도 했다. 최 청장에 의하면 경부선의 새마을호가 서울역에 들어와서 때로는 화장실 청소를 못하고 부산으로 향하면 소변이 물 대신에 올라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년 후인 지금은 많이 변해서 전국에서 가장 위생적인 화장실 컨테스트도 하는 등 어디를 가나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져서 다행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용자들의 청결성에 대한 의식부족인 것 같다. 공중화장실을 자기 집 화장실처럼 사용하면 청결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10여년 만에 김천을 방문했을 때 직지사 옆에 있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상을 탔다는 곳을 가보았다. 참으로 격세지감이었다. 예술적으로 지어놓고, 청소하는 사람이 배정되어 있어서 늘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민족은 한다면 해내는 저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나라의 문화수준은 거창한데서 찾기보다는 24시간 사용하는 화장실의 청결성 여부에서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일본 지방에 있는 사찰을 찾았을 때 깨끗한 화장실에 감복했던 일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 오지의 사찰 화장실은 아직은 재래식으로 되어 있어 빠질 것 같아 사용하기가 겁이 난다. 강의시간에도 학생들에게 공중화장실도 내 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를 했더니 한때 내 별명을 “화장실 교수님”이라고 붙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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