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9월 어느 날 저녁, 가냘픈 초승달의 배웅을 받으며 드디어 미국 화물선 Shooting Star에 몸을 싣고 부산항을 떠났다. 전쟁 중 황폐화된 조국과 고생하는 가족, 친구들을 뒤에 두고 여고 동기인 전옥숙과 함께 박은혜 교장선생님께서 주선해 주신 캔터키 주의 모해드주립대학교(Morehead State College)로 가기 위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이와 둘이 같이 떠난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군복무 문제로 여권 발행이 지연되었고, 나는 가을 첫 학기에 맞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초승달만 보면 함께 떠나지 못했던 그날을 되새기며, 그리워하곤 했다. 떠나기 전날은 쇼팡의 이별곡을 부르며 헤어지기 섭섭한 마음을 달랬다.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노래를 부르던 그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떠나는 날은 강원용 목사님과 양준철 씨, 한배호 씨, 오덕주, 김명숙 등 친구들이 화물선 갑판 위까지 올라와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는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을 무척 서운해 했고, 먼저 떠나는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여러 번 나에게 말했다.
“차가운 초승달을 보면서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허전했는지!...”
이별은 언제나 남는 사람에게 더 쓰라린 법인가보다. 나는 화물선이 항구를 서서히 떠나 망망대해에 들어서면서 배안의 낮 설은 환경에 적응하기 바빠 가족과 친구들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화물선이라고 해서 아주 누추한 선박을 상상했는데 선실도 깨끗하고 음식도 좋았다.
두 주일간 항해하면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몇 번 있었다. 피난민 생활이었지만 외국 간다고 옥숙이와 나는 파자마를 새로 준비했다. 우리는 그것도 새 옷이라고 갈아입었다. 같은 배에 탄 두 남학생(후에 미국에서 의사가 됨)도 새 파자마를 입고 서로 선실을 왔다 갔다 했다. 마침 같은 배에 탄 미국 선교사 노부부가 우리를 자기 선실로 데리고 갔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에게 “미국에서는 젊은 여성이 파자마 바람으로 남자 방에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웃으면서 충고했다. 그때의 무안함이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첫날 아침 식당에 콘 플레이크스 (corn-flakes)가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몰라서 다른 테이블을 훔쳐보았다. 상자를 뜯어서 콘플이크스를 그릇에 담고 설탕을 넣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봤어야 하는데 거기까지만 본 게 실수였다. 콘플레이크스와 설탕이 겉돌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설탕 조금, 콘플레이크스를 조금씩 숟갈에 담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를 부어야 하는데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유학생들 치고 이런 경험을 한 두 번씩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던 일은 배 멀미였다. 옥숙이와 나는 멀미가 심해서 미국으로 괜히 가는 것이 아닌 가 후회를 할 정도였다. 침대에 누워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선교사 부부가 들어와서 기도까지 해주었다.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입항했다. 같이 간 남학생의 부모님인 오창희 목사님 내외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여고 선배이며 옥숙이의 에스언니 집에서 며칠 묵으며 미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그리고 또 기차를 타고 켄터키 주로 갔다. 모헤드 대학은 아주 작은 도시에 있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캠퍼스 타운이었다.
당시 전쟁 때문에 ‘코리아’가 미국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모헤드 대학생들이 우리에게 “너희 나라에는 개나 고양이가 있니?” “너희 나라에도 사과같은 과일을 재배하니?” 등 마치 우리가 달나라에서 온 사람들같이 기가 찬 질문세례를 받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그런 한국이 이제 세계경제 11위에 올라있으니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루어낸 우리는 확실히 대단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이 자리를 지켜야 할텐데….
옥숙이와 나는 먼저 도착한 동기인 오창숙과 같이 셋이서 1학년으로 등록을 하고 나는 정치학, 창숙이는 피아노, 옥숙이는 교육학을 전공했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법학과를 택하려 했으나 교수님들께서 영미법과 한국의 대륙법에는 차이가 있어 귀국해서 사법고시를 보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접분야인 정치학으로 바꾸기로 했다. 지금처럼 국제화시대였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당시 이 대학에는 우리 외에도 윤호근 씨 (후일 뉴욕 총영사, 핀랜드 대사), 정문도 씨 (후일 현대건설, 중공업 사장) 등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옥숙이를 따라 주일이면 학교 근처 감리교 교회에 다녔다. 어느 일요일, 옥숙이는 교인으로 등록을 하고 나는 세례를 받기로 했다. 둘이서 목사님 앞에 섰는데 그 목사님께서 누가 세례를 받는 학생인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영어로 “Are you the one who wasn't baptized?"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한국식으로 ‘yes’와 ‘no’를 반대로 대답을 했다. 목사님은 이미 세례를 받은 옥숙이 머리에 손을 얹고 의식을 시작했다. 결국 옥숙이는 평생에 세례를 두 번 받은 셈이고, 나는 교인들이 거의 다 가고 없는 곳에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졌었다. 그 후 나는 yes와 no의 사용법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게 되었다.
여고 시절부터 모범생이었던 우리는 묵묵히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는 여고에서 영문법만 배웠을 뿐, 회화는 전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추방 당할까봐서도 매일 밤 영어 사전과 씨름을 해야 했다. 아침이면 “나 오늘 코피 쏟았어. 너는?” 하는 게 인사였다. 수업시간 사이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나라 사정이 송금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두 교내에서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일을 했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온 창숙이와는 달리 옥숙이와 나는 거의 가불로 살았다. 나는 다행히 강의가 없는 오후에 기숙사에서 전화를 받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특히 로버슨(Robertson) 사감 선생님이 나를 무척 아껴주시고 이해해주셨다. 일이 끝나면 꼭 먹을 것도 챙겨 주시곤 했다. 그 분은 우리가 결혼 할 때 워싱톤까지 와서 bridal party를 성대히 치러주셨다. 우리가 귀국한 후에는 한국도 방문했다. 나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는데 99세에 돌아가셨으니 백수를 누리신 셈이다.
학교 축제가 있을 때면 기숙사일이 무척 바빴다. 남학생들이 꽃다발을 들고 여학생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미국에도 1950년대에는 시설이 낙후되어 방에 전화가 없었다. 일일이 내가 2, 3층으로 뛰어가서 여학생들을 불러야 했다. 어느 날 대학원생인 정문도씨가 로비 한쪽에서 나를 지켜본 모양이다. 공부하다 말고 뛰어다니며 여학생을 불러내곤 하는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나보다. “어쩌면 남들을 전혀 부러워하는 기색 없이 틈만 나면 사전을 찾고 있는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평생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을 때면 편지를 썼고, 그가 보낸 편지를 읽는 재미로 살았다. 우리는 부산에서 데이트 할 때 손을 잡은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그 사람과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