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갑과 연구년 (71회)

나의 환갑과 연구년

1993년, 내가 60세가 되던 해에 성신여대에서 모처럼 연구년을 얻었다. 연구년에는 대부분 외국대학에 가서 연구하고 오는 경향이지만 나는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는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결혼 이후 가장인 남편위주로 살아왔고 그래야만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학자이기 이전에 아내이고 가정주부이고 어머니라는 역할도 소중하기 때문에 연구년을 활용해서 오랜만에 도배도 하고 가구도 재배치했으며 수십 권의 사진첩을 6권으로 압축시켰다. 그밖에 학기 중에는 할 수 없었던 크고 작은 집안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사진첩 정리는 그 많은 것을 그대로 두고 죽으면 나중에 아들 내외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지만 남편의 지역구와 외무위원장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사진은 정리를 못해서 늘 내 머리를 짓누르는 듯 했다.

집안 일을 하면서도 학교에 약속한 논문을 위한 자료 수집을 하고 집필하는데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워싱턴에 있는 아들 내외가 긴요한 자료를 복사해 보내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책상 앞에서 논문 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매일 출근하면서 쳇바퀴 돌 듯 정신없이 뛰어 다닐 때와는 달랐다.

가끔씩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Endless love”와 “A love until the end of time”을 가장 많이 들은 한 해였다. 젊은이들이 보면 회갑의 나이에도 ‘무슨 감정이 남았다고 그런 달콤한 음악을 듣는가“ 라고 의아해 할지도 모르나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멜로디와 가사이다.

어려서 환갑노인을 바라볼 때는 인생을 다 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 자신이 60이 되고 보니 몸은 노화되었는지 몰라도 마음은 여전히 젊은 느낌이다. 그런 현상이 바로 비극이라고 한 제자의 말이 떠오른다.

한 친구는 어머니를 일찍 잃은 후 40대의 아버지가 재혼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노망인가. 무슨 새장가를 가시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자기 나이 60세가 되고 보니 아버지에게 불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옛날 같으면 환갑 나이는 고려장감이었을 것이다. 환갑날 우리는 조촐하게 외식을 하고 돌아왔다. 남들은 환갑 때 여행을 했다지만 우리는 국내에서 할 일들이 많아서 떠날 수가 없었다.

외교정책 자문위원장 피선

그 해 중반 외무부 외교정책 자문위원회에서 이상우 전 위원장 후임으로 내가 선출되었다. 한승주 외무장관의 아이디어였다. 청주대학의 이은호 교수가 나를 추천하고 한병기 전 캐나다 대사가 재청했을 때, KBS의 이청수 위원이 김경원 전 주미 대사를 추천했으나 본인이 철회를 해서 무투표로 결정이 났다.

여성으로서 외교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장은 내가 처음이고 그 후로 여성위원장을 아직 배출하지 못해 유감이다. 이상우 서강대 교수, 김달중 연세대교수와 나는 국제정치학회에서도 이상우 교수가 먼저 회장을 했고 그 뒤를 내가, 이어서 김달중 교수가 회장에 선출되었는데 외무부 정책자문위원회에서도 위원장의 순서가 같은 순으로 이어졌다. 다른 위원들과 상의해서 한양 대학의 유세희 교수를 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 1993년 한승주 외무장관이 TV대담을 하고 있다 / 1993년 나는 한승주 외무장관 추천으로 외교정책 자문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오랫동안 외무부뿐 아니라 통일부의 교육홍보 위원장으로도 활동을 해오면서 늘 위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각 행정부서 마다 정책자문위원회라는 것이 있지만, 1년에 몇 번씩 20여명 되는 위원회를 소집해서 하는 일이란 장관과 정책실장등 간부들이 참석해서 정책설명을 하고 위원들의 질문이나 코멘트를 듣고 종회하는 것이다. 그 후에는 식사대접과 거마비를 받고 돌아오는 것이 전형적인 절차이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그때는 그랬다. 그런 모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선 자문위원 수가 너무 많아서 제한된 시간 안에 한마디도 못하고 끝날 때가 많고, 전혀 심층적인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장관이나 실 국장들도 교수들의 말에 별 신경을 쓰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정책건의나 비판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적절한 모임 같지가 않았다. 결국 해당부서 정책을 정당화하거나 홍보하는 효과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외무부는 그 위원수를 해를 거듭하며 증원해서 내가 있을 때만 해도 너무 비능률적이었다.

그러한 평소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운영방식을 개선해 보았다. 자문위원회를 분야별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모임을 갖고 전체회의는 1년에 두 번 정도 소집하자는 안을 냈다. 그 결과 안보외교, 경제무역 국제교류, 통일외교 분과위원회로 분류해서 각자 원하는 분과위원회를 지망하도록 하여 운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임기가 끝난 후 다시 과거의 포맷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미․북 제네바 협약(Geneva Framework)

우여곡절 끝에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미국과 북한 간에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 틀”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 직후 한승주 외무장관이 외교정책 자문위원회를 힐튼호텔에 소집하고 그 사실을 통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동안 전혀 사전 정보가 없었던 자문위원들은 갑작스런 통보에 놀라면서 그 자리에서 한 장관의 설명을 토대로 약간의 토론이 있었다. 그날 나는 어쩐지 첫 단추를 잘못 채운 느낌이 들었다. 제네바합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생략하려고 한다.

이 협약에 대한 찬반론이 나왔다. 북한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제네바 협정이 북한의 미래 핵을 동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어도 과거 핵을 규명하는 데는 미흡했으며 따라서 북한은 앞으로 비밀리에 핵개발을 계속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 협정 체결로 북한 핵 위기가 완화되었다고 평가하고 미.북 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고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후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가 구성되어 북한에서 경수로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고 북한 핵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정찰 인공위성이 북한의 우라늄 핵물질을 개발을 촬영하게 되었고, 평양이 이 사실을 인정을 하게 된 후 미국이 제공해 오던 중유공급을 중단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제네바 회의 막바지에 가장 어려웠던 고비는 바로 경수로 건설비용 문제라고 들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느닷없이 경수로 건설비의 3분의 2, 즉 75%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로, 합의서 서명을 앞당기게 되었다고 미대사관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로버트 갈루치 미 정부대표가 한국정부의 제안을 전해 들었을 때 “정말이냐? 사실이면 협상은 끝난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조건 없이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겠다고 나선 정부에 대해 실망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핵문제의 첫 단추를 잘못 잠군 실패작임을 후일 갈루치 대표도, 클린턴 대통령도 자인했다는 후문이다. 반대로 세계 초강국인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끌어낸 북한 외교력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