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재산등록 공개
그 시절 언론을 보면 마치 부자는 나쁜 사람, 가난한 자는 착한 사람이라는 2분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수단에 의한 재산 형성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정치인의 재산은 오히려 마이너스라며 무척 청렴하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이가 50세에 가깝도록 마이너스 인생에서 탈출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코 칭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직자의 재산 내역은 본의 아니게 인권이 침범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미국처럼 관보에 실어서 관심 있는 사람만 보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재산 형성 과정에서 부정축재를 한 사람에 대한 적절한 처벌은 별도의 문제이다.
당시 재산 공개 이후 민정계 의원들에게는 공개 경고 조치를, 민주계 의원들에게는 비공개 경고 조치를 취했다고 해서 민정계가 뒤늦게 JC(이종찬)를 밀걸 잘못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선거운동은 수적으로 우세한 민정계 의원들이 앞장서서 뛰었건만 민주계의 가신들만 권좌에 앉게 되자 손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민정계가 그런 말을 할만도 했다.
박양실 보사부장관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해직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안타까워했다. 후배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추진력과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분이라, 잘 된 인선이라고 생각하고 큰 기대를 걸었는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다. 고인이 된 남편의 재산과 본인이 의사로서 열심히 벌어서 재테크한 결과 모아진 재산을 마치 부정 축재한 것처럼 해서 물러나게 한 것은 부당하다.
박 장관의 핸드백이 샤넬 유명품이라며 크게 사진을 실은 신문을 보고 나는 격앙했다. 샤넬을 들건 구찌를 들건 그런 사적인 일까지 언론이 취급했을 때 역시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백의 종류와 보사부 업무와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대 제자인 백영옥 교수가 “교수님도 조심하세요. 교수님은 가짜 부로치를 달아도 남들은 진짜라고 보거든요”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문민정부 출범 후 반년 이상이나 12.12, 5.16, 광주항쟁, 평화의 댐, 율곡사업 등 과거에 대한 평가를 귀가 따갑게 떠들었고 과거의 정치인들이 줄줄이 사정대상으로 투옥되었다. 지역구에 남편을 따라가보면 경제나 살려놓고 그런 일에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93년 7월 21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성병욱 논설위원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이 재산공개는 갑자기 실시하지 않는다고 다짐해 놓고 어느 날 느닷없이 발표했으니 이 정부는 ‘깜짝쇼의 명수’라고 지적하고 과거를 들추는 사정은 이제 그만하자고 호소했다.
어느 비공개 토론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YS는 개혁대상이 되는 계층의 지지로 마음껏 돈도 쓰고 당선된 대통령인 만큼 무조건 “나는 한 푼도 안 받고 한 푼도 민자당에 안 준다”는 말 대신에 “나도 구정치 풍토 하에 당선된 사람이지만 나로서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단호한 의지에서 개혁을 단행한다”고 겸손하게 선언을 했더라면 국민의 호응과 동정을 더 얻을 뻔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문민정부에 대한 기대와 실망
이상하게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형사고가 연발했다. 육해공뿐 아니라 지하에서도 대형사고가 났다. 전북 위도 앞바다에서 페리호 침몰로 근 300여명이 사망했고, 경남 구포역 열차전복 사고로 70여명이 사망했으며,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한 사고의 연속이어서 고사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일까지 정부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하나 인재에 의한 사고라면 정부도 일부 책임이 없을 수 없다고들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끝으로 군출신 대통령시대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두 기대가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YS의 통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과거사에 매달려 전진할 수 없는 행태는 노무현 대통령 때 시작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학자들은 “YS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좌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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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종종 '깜짝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1994. 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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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사에서 ‘민족이 우방보다 우선’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논란이 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미련 때문에 대북정책의 방향을 상실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6.25 전쟁의 날, 쌀을 가득 실은 선박이 북한으로 떠났다. 막상 원산항에 도착해서는 푸대접을 받고 왔다고 해서 “주고 뺨 맞고 왔다”고 국민들의 분노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정책 때문에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기도 했다.
초반의 기대와는 달리 문민정부의 모순이 언론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예측 가능한 정치”를 다짐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깜짝쇼의 연속적인 공연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는 지적들이었다. 93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대통령의 공언(公言)과 공언(空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쌀은 대통령 직을 걸고 개방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나서 개방했고, CBS 방송에서 당정개편은 생각도 안 한다고 공언하고서 신임 총리임명과 개각발표를 했다.
이때도 주요 일간지에서는 남편이 외무장관도 되었다가, 민자당의 총무도 되었다가, 정책의장이 되기도 했다. 물망에 오른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했다. 그런 자리를 맡을만한 그이의 자격을 당과 기자단이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총무가 되었다면 그는 적이 없고 부드러운 성품이여서 여야관계를 원만하게 타결할 수 있는 소질을 충분히 발휘했을 것이다. 정책의장을 해도 교수출신으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사람으로서 당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YS는 마음에 둔 후보라도 신문에 하마평이 오르내리면 오히려 안 된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소문이 어떻게 퍼지는지도 궁금했다. 문민정부는 또 개혁을 외치면서도 인사는 4. 5. 6 공화국 인물들을 기용해서, 인사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이는 YS정권 1년도 안되어서 입버릇처럼 “기분에 나는 15대 국회에서나 실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의 느낌은 5년 후 현실이 되었다.
한때 재미있는 소문이 돌았다. 대구에서 선거기간에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간접적으로 경남후보 지지를 호소해서 당선시켰는데 TK가 소외되자 손가락을 잘라서 부산 앞바다에 던져 버리자고 한다는 것이다. 또 건배를 할 때 “몰랐나?” 하면 “몰랐다!”라고 응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에 그래도 한국이 OECD 회원국이 되었고 세계화를 강조한 점은 공(功)으로 높이 사고 싶다. OECD 가입 과정에서 무리한 면이 있었고 또 세계화와는 거리가 먼 결정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