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인선 (67회)

코미디 같은 해프닝이 있었다. 당무회의가 있기 직전에 그이가 외국에 다녀왔다는 보고도 할 겸 인사차 YS 사무실에 들렀다 나왔는데 다음날 모 일간지 가십난에 YS가 김윤환 의원, 박정수 의원, 정석모 의원을 각각 불러서 요담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아마도 김, 정 의원들도 인사차 들렸을 것이다. 그 기사 때문에 입각하느냐는 전화가 쇄도해서 우리부부는 마주보며 웃었다.

특히 김 대통령이 박정수, 정석모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우리는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그 날 인사를 하러 갔을까 하며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체험을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 넌센스였다. 새로 임명된 외무장관은 YS의 차남 김현철씨가 추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그이와는 달리 그때까지도 총선에서 우리 지역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했고, 국가를 위한 일꾼을 선출하는 만큼 여론이 그이를 지지하면 마음이 변하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었다. 그것이 상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당에서 그이를 추천할 때마다 청와대에서 거절했다는 소문과 YS 친척을 통해 YS가 그이를 아주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또 김 대통령은 한번 틀어지면 죽어도 풀지 않는 성격이라는 말을 듣고 난 후부터는 문민정부에서 발탁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였는지 그이가 세상을 떠난 후 영안실에는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해서 생존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의 조화가 들어왔으나 김 대통령의 조화만이 보이지 않았다. 한때 같은 당의 중진의원이었는데....

YS정부 초반에는 김윤환 의원이 그이에 대해 대통령께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박정수는 절대로 입각할 수 없고 YS정부 2기에 자기가 총리가 되면 그때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했다는 말을 김정례 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심지어 안기부 사람들까지도 김현철 씨와 가까워지라는 충고를 했다. 어린 사람을 왜 사귀라고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후일에야 김현철 씨를 “소통령”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민정부 출범 1년 후 그이를 아끼는 모 신문사 기자가 그이에게 “박 의원은 여러 채널에서 추천이 올라가지만 민주계 의원들 말에 의하면 이종찬, 박태준 사람이라는 흠 때문에 절대적인 기피인물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이는 박정희 정권 때는 정일권 사람이어서, 전두완 대통령때는 김재규 사람이라서, 김영삼 정권 때는 박태준, 이종찬 사람으로 분류되어 기피인물이 된 셈이다. 정치란 객관적인 인물 평가보다는 인맥이 우선시 되는 것이 현실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김천 지역구민들 사이에도 ”박 의원은 줄을 잘못 섰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 김영삼 정부의 초대 내각 / 동아일보 (1993. 2.26.)

그이가 결정적으로 자리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게 된 계기는 아메리칸대학(AU)과 미의원단과의 청와대 방문 사건 이후였다.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이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 대통령의 명예박사학위 수여행사를 갖는다고 졸업생인 우리부부를 초대했다. 마침 국회 회기 중이어서 그이가 청와대의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에게 연락을 하고 가도 되느냐고 문의를 했더니 김기덕 공보관에게 넘겼다. 그 다음에는 주돈식 정치수석이 전화로 박관용 비서실장과 의논한 결과, 대통령은 회기 중에 해외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한편 AU동문인 오세응 의원과 윤영오 국민대 교수는 박 의원이 AU 동문회장이고 초대도 받았는데, 참모진들이 YS에 건의를 안 한 것 아니냐며 불만이었다. 회기 중 의원의 외유금지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계의 예산심의와 법안심의 위원장은 러시아를 방문 중이었다. 청와대가 적용하는 잣대가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서울대 구영록 교수가 이 말을 듣고 우리가 그런 행사에는 참석했어야 한다며, 아마도 우리내외가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 민주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알았으면 대통령께 직접 건의할걸 그랬다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구 교수는 YS가 우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우리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미국 의원단이 방한했을 때 그이가 대동하고 청와대에 가기로 결정되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청와대에서 그이를 오지 말라는 전갈이 왔다. 이렇게 철저하게 남편은 청와대의 기피인물이었다. 지금도 과연 YS의 지시였는지 아니면 비서진의 결정이었는지를 알고 싶다.

문민정권 5년 동안에 왜 그이와 YS는 가까워질 수가 없었을까? 주변사람들은 그이가 김현철 씨의 시야에 잡히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는 말도 있고 민주계 중진들의 견제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YS가 전화했을 때 “알았습니다”라고만 할 것이지 왜 굳이 “노대통령 노선을 따르겠다. 이종찬 의원이 경선하도록 일부 대의원의 서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까? 그렇게 부드러운 그이가, 사석에서는 ‘YS후보가 순리’라고 주장한 사람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초선의원들까지도 조찬에 초청을 하는 등 민정계 의원들을 다 부르면서 자기한테만 끝까지 연락을 안 한데 대한 서운함이 그런 반응을 보이게 했을까? 그것도 그의 운명이리라.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금융실명제

YS정권의 실적 가운데 한 가지로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런 정책발표에 국민이 놀라기는 했어도 언젠가는 실시해야 할 일이었다. 이때는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고,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뛰어준 많은 정치인들이 토사구팽 당하던 시기였다. 김재순 전 의장이 정계를 떠나면서 던진 한마디가 “토사구팽”이었다. 그 단어가 한동안 유행되기도 했다.

국회의원 재산 공개 내역이 신문에 발표되었다. 우리는 160명 가운데 112위였다. 남들은 자녀 재산은 제외시켰다는데 우리는 고지식하게 미국에 있는 아들 내외의 은행기록과 자동차 종류까지 적어서 제출했다.

남들의 어마어마한 재산규모에 놀라기는 했으나 결코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재테크 능력을 부러워하고 우리부부의 무능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부인들이 재산을 모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