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입학과 유학준비 (4회)

실은 서울법대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뜻밖에 미국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한 학기라도 대학 경험을 하려던 차에 우리 졸업식에 연사로 오신 김활란 박사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한 나를 유심히 보셨는지 “꼭 이화여대로 오라”는 말씀도 있었고 해서 이화여대 법학과에 응시를 하게 되었다.

이대에서 구두시험을 볼 때 이영섭 교수(전 대법원장), 이태희 교수(전 검찰총장), 이병길 교수 세분이 계셨다. “몽테스큐의 3권 분립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셨다. 자신 있는 문제여서 정확하게 답했다. 덕분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교수님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법학과 한 학기 강의 가운데 가장 머리에 남는 것은 이영섭 교수님의 민법 강의였다. “민법이란 오징어와 같아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학문”이라는 말씀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친구들과 미장원에 먼저 갔다. 길게 따서 뒤로 두 갈래 늘어뜨리고 다니던 머리를 미련 없이 자르고 파마를 했다. 그러자 나는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머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었다. 드디어 경기고녀 훈육주임의 엄격한 감시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특히 기쁜 것은 힘든 수학과 과학 과목을 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공교롭게 그이도 수학과 과학에 약했다. 학문분야에 대한 소질이나 성향은 같지만 성격은 다른 점이 많았다. 그이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들끓었고, 나는 친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내가 차갑게 생겼다느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다고 말했다. 제일 친하던 강인숙과 나는 한 동네에 사는 최영자 집에서 시험 준비를 한다고 밤을 샐 때가 있었다. 자기들은 자는데 나는 자지 않고 꼬박 샌다고 비난 아닌 비난도 받았다. 실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때문에 자지 못했던 것인데...

가을학기에 맞추어 유학을 가게 된 사실을 교수님들께 말씀 드렸다. 이영섭 교수님과 이태희 교수님께서 유학은 졸업 후에 이대에서 보내 줄 테니 여기서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꼭 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간곡한 교수님들의 당부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운해 하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셨다. 어리광쟁이 막내딸이 유학 간다고 신이 나 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마음이 착잡하셨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 마음은 아랑곳없이 들뜬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이도 미국으로 가기 때문이었을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19살! 그야말로 청춘의 끓는 피를 가진 나이가 아니었든가! 나는 내가 건너야 할 태평양보다 더 넓고 큰 야망과 꿈을 가진 열아홉 청춘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을 멀리 타국에 보내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으셨던지 유학시험에 합격하고 집으로 왔을 때, 딸의 합격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왠지 서운한 표정이었다. 어머니의 깊은 속마음을 어찌 어린 내가 헤아릴 수가 있었을까? 내가 학업에 몰두해 좋은 성적을 갖고 오면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셨다. 자식 교육에 유난스러울 정도로 열심이셨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몫의 사랑까지 내게 주셨던 어머니는 막내딸인 나에게 특히 많은 기대를 거셨다.

우리 전주 이 씨 광평대군 자손 친척 중에는 이미 영국, 일본, 프랑스에 가서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서 국회의원도 되고 서울시장도 되었다. 그 영향인지 어머니는 평소 내게 박사학위까지 받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며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는 귀국하지 말라”고 하셨다.

유학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늘 그이와 붙어 다녔다. 사랑하는 보이프랜드도 생겼고 그토록 원했던 유학까지 가게 되어 나는 온 세상을 얻은 기분에 들떠있었다. 이때 나보다 영어가 우수한 그 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으로 가게 되어서인지 1952년 봄 학기는 여유로웠다.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영화관에도 가고, 하나 밖에 없는 부산 광복동 양식당에서 스프와 빵도 먹으면서 장래를 이야기 했다. 그와 가장 가깝게 어울려 다니던 세 명의 친구, 전영철 씨 (전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 조철화 씨 (전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이석희 씨 (재미 사업가)는 멀리서 나를 엿보며 그이를 놀리기도 했다.

▲ 그 이의 연세대 재학 시절 / 뒷줄 왼쪽 두번째가 박정수

드디어 우리 집과 그의 집에서도 눈치를 챘다. 그 쪽에서는 내가 편모슬하에 불교가정의 자녀라는 점을 못마땅해 했고, 우리 집에서는 그 쪽을 ‘예수쟁이’ 집이라고 꺼려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데이트를 막거나 심각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마침 강원용 목사님 가족이 부산 서대신동 그의 집 2층에서 기거하게 되어 목사님 만나러 가는 구실로 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드나드는 일이 쉬워졌다. 우리가 연인 사이가 되기 전부터 오덕주(김창성 경총회장 부인), 전옥숙(재미 동양철학자), 박민자(재미)와 나, 넷이서 그의 셋째 형님인 박윤수 씨(재미 물리학자)로부터 수학과 물리 과외공부를 받은 일이 있다. 또 목사님이 소집하는 모임에 갈 때마다 그 사람의 부모님, 형님, 동생들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겼다.

강 목사님 가족과 그의 가족이 부산 피난시절에 아래 위층에 같이 살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강 목사님 부부와 어린 아들, 그리고 두 딸, 다섯 식구가 부산 피난 시절 항서교회 다락방에서 기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 가족은 방을 비워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목사님은 갈 곳이 없어 피난민 수용소에 가려고 짐을 모두 교회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리어카를 얻으러 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짐과 식구가 없어져서 깜짝 놀랐다. 알아보니 그 이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이는 목사님 댁에 다니러 갔다가 딱한 사정을 알고 그 길로 목사님 가족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는 것이다.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았으나 그이는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이는 한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강원용 목사님께 김천에서의 부흥회 인도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바빠서 수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이는 이미 목사님 성함이 인쇄된 벽보를 김천시 도처에 붙여 놓았던 딱한 처지였다. 이 사정을 들은 강 목사님은 시간을 쪼개 부흥회를 맡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그의 집에서 숙박을 했다. 그 후부터 부모님도 강 목사님을 잘 아는 터였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이 모두 교회 장로, 권사로 평소 목사님을 존경하는 분들이었으니, 목사님 가족을 모셔 가는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늘 붙어 다니면서 장래에 대한 꿈을 마음껏 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꿈꾸는 시절이 가장 아름다운 때인 것 같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만 받으면 모든 소원이 저절로 풀릴 것 같았다. 자연 우리의 최상 목표는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미국에 가면 학부부터 다시 시작해서 학사, 석사, 박사, 세 학위를 10년 안에 마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후 귀국해서 결혼을 하고, 그이는 국회의원, 나는 교수가 되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이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서 있었다. 어려서부터 외삼촌이 초대 입법의원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입법부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나는 실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교수가 좋겠다고 권해 쾌히 받아드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0개년 계획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 후 우리의 삶은 당초의 계획에서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결혼 시기가 앞당겨졌고 미처 계획을 못 세웠던 남매를 얻게 되어 학위취득에 2년이 더 걸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