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월, 정재문 외무위원장 내외를 비롯, 외무위원인 봉두완, 이종찬 의원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조지타운 대학교의 CSIS 세미나와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갔다. CSIS 세미나는 서울과 워싱턴에서 번갈아가며 개최되는 한미 정치인, 학자들의 행사였다.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인 워싱턴에 간다고 해서 선뜻 따라 나섰다. 아들 내외가 그곳에 살고 있었으나 마침 며늘아이가 박사학위 시험 중이라 아들집에 가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다.
공식적인 모임에는 부부동반으로 다녔으나 국회의원들만 참석하는 회의가 있을 때는 나는 조지 워싱턴 대학, 아메리칸 대학, 조지타운 대학의 도서관과 캠퍼스 서점에 들러 논문자료를 수집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전공도서도 사고 자료를 복사하기도 해서 퍽 유익한 기회였다.
미국대통령 취임식에는 초청받지 않은 정치인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는 전에도 레이건과 부시를 지명한 공화당 전당대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그들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여 미국 정당정치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목격한 바 있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이건 대통령 후보의 지명수락 연설을 잊을 수 없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할 때는 단호한, 호소력 있는 그의 연설은 내용과 성격은 달라도 워싱턴 광장에서 행했던 마틴 루터의 연설만큼 우리를 감동시켰다. 과연 명배우라고 생각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서로를 향한 끔찍한 사랑이야기 또한 감동적이다. 그가 치매로 장기간 고통을 받다가 서거한 후 여야를 초월하여 그를 아쉬워했다. 레이건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려면 전쟁준비를 하라는 옛말대로 SDI 정책으로 소련의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여 냉전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치인이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 사후에 레이건 만큼 국민의 슬픔과 아쉬움을 자아내는 분이 있을까?
클린턴 대통령 내외가 의사당에서 취임식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이어지는 펜실베이니아 가(街)를 걸으면서 양쪽의 군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은 참 아름다워 보였다.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젊고 학력, 능력도 뛰어난 한 쌍의 대통령부부상! 부러운 그림이었다.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는 미모이면서도 패기와 실력을 고루 갖추어 그 내조의 공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다.
최근 힐러리 자서전을 읽으면서 미국은 두 사람의 대통령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백악관의 전략 회의에 힐러리가 꼭 참석하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부였다.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한 남편의 외도만 아니었던들 힐러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을 것이다.
외무위원회 대표들은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 브루킹스 연구소( Brookings Institution) 등 미국의 여론형성 역할을 하는 기관에서 사전 약속대로 매일 간담회를 가졌다. 정재문 위원장은 YS가 신세진 분들에게 인사하느라 바빠서, 남편이 모든 간담회 사회를 맡았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을 위한 조찬 기도회에도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도 만나고 정치인들과의 교분도 갖기 위해 이 모임에는 외국 귀빈들이 많이 참석한다.
워싱턴 방문 기간 중 그이는 이종찬 의원에게 92년 선거를 겨냥하지 말고 차기를 위해 YS 손을 들어준 후, 선거본부장을 맡았으면 지금쯤은 당의 제 2인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의원을 차기 후보감으로 생각했고 YS와 경선에 참여하게 된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위로해 주었다. 부인도 할 말을 잃고 “그렇게 되었어요. 글쎄,” 라고 해서 나는 ‘주위사람들이 이 의원 내외를 오도하고 자기들의 한풀이를 한 셈이 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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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4월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두고 박태준, 이종찬, 박철언 등 민정계 중진이 단일후보를 내기로 하며 김영삼과 더욱 적대관계로 치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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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허주에 의하면 실제로 자기가 박태준 대표와 이종찬 의원에게 선거대책본부장 자리를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했다. 박 대표는 YS가 마산으로 도망갔을 때 허주가 데리러 가지 않았으면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든 행적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과의 관계가 미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이에 대한 YS의 감정이 나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새 정부의 외무장관으로는 박정수 의원이 발탁 될 것이라고 점치는 분위기였다.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그이는 늘 인사개편이 있을 때 마다 외무장관으로 지상발령을 받곤 했다.
여러 외무부 사람들이 와서 직업 외교관보다는 정치인 장관이라야 외무부 위상이 올라간다며 그동안 국회 외무위원장도 역임하고 외무위원회의 최장기 의원으로서 그이가 가장 적격자라는 분위기라고 귀띔해 주었다. 김윤환 의원도 대통령께 그이를 외무장관으로 추천했다고 말했다. 미국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외무장관은 정치적 임명자로 충원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직업외교관이 장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