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북한이 남쪽을 너무 모르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웠다며 기회만 있으면 국회의원 간이든, 정상 간이든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는 길만이 상호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정치인으로서 처음으로 평양방문을 한데 대한 원고청탁과 강연청탁으로 그이는 연일 바빴다.
유엔가입 경축 사절단에 남편은 외무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나는 외무부 정책 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선정되어 같이 가게 되어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외무부 국제기구과에서 부부가 같이 대표단으로 갈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몹시 실망한 나는 국제기구 국장에게 항의 전화를 했더니 남들이 부부가 같이 가면 비난을 한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미국의 돌(Bob Dole) 상원의원과 적십자사 총재인 부인은 각자의 직업에 의한 동반 여행을 자주 하는 부부이다. 선진국과 한국의 문화는 다르다고 하겠지만 가장 국제 감각이 풍부해야 할 외무부 직원들의 고루한 사고방식에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1994년 2월에도 한․미 21세기 위원회 창립행사에 그이는 국회의원 자격으로 나는 외교정책자문위원 자격으로 선정되었으나 부부가 갈 수가 없다고 해서 이경숙 교수가 대신 참석한 일이 있다.
귀국한 후에도 그이는 김천 아니면 국제회의나 국정감사로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나는 방배동 아파트와 성신여대를 지켰다. 남편이 별을 달면 달수록 아내는 고독하다는 고 이태영 박사의 말씀이 가끔 머리에 떠올랐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오랫동안 남편이 원하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하던 터였기에 그이가 바쁘게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면 흐뭇했다.
나 자신이 교수라는 직업이 있었기에 외롭기커녕 정신적으로 안정되던 시기였다. 서로가 그렇게 바쁘게 지내면서도 그이는 다른 사람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면 꼭 그 곳에 나를 데리고 가주어 감동시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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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리 에스쿠 루마니아 공화국대통령이 남편의 IPU집행위원 당선을 축하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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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7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뇌암으로 잃은 후, 뼈아픈 슬픔을 딛고 일어선 나는 성연이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 성연이가 살아 있다면 쏟았을 정열과 시간을 불우한 사람을 위해 쏟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 동기에서 눈물로 쓴 것이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 이라는 수기였다. 출간 당시는 어린이 병원을 건립하고 싶다는 큰 꿈을 가졌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10여년 간, 많은 분들과 다양한 단체로부터 받은 장학금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우리도 언젠가는 고학하는 어려운 학생들을 도우며 살자는 다짐도 했었다. 결국 작은 규모의 장학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어린이 병원이라는 큰 꿈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죽은 딸의 이름을 따서 '재단법인 박성연 장학회‘를 1991년에 설립하여 액수는 많지 않아도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주는데 보람을 느끼며 성연이를 기리기로 했다. 그이가 평양 IPU에 다녀온 직후 모든 절차를 끝냈다.
성연이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유별나게 믿음이 좋았고 가엾은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인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그의 죽음을 많은 친지들이 아쉬워했었다. 우리가 성연이 대신 불우한 학생들의 교육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함으로써, 하늘나라에 있는 성연이도 기뻐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70년대 중반부터 장학재단 설립에 필요한 기본금(정부가 책정한)을 저축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90년에 와서 드디어 목표액이 달성되어 장학회를 발족시켰을 때는 마치 큰일을 해낸 듯 기뻤다. 처음에는 김천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고 1998년부터는 대학 장학과에서 선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남편에게 고마운 것은 선거 때 돈이 그렇게 아쉬웠지만 장학기금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남편이 후에 병상에 있을 때 만일 그가 떠나면 ‘박성연 장학회’라는 이름 대신에 그이의 호 ‘자운(紫雲)’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물었을 때도 단호하게 반대를 했다. 남편의 집념이 아니었던들 미완성의 꿈으로 그쳤을 장학재단은 바로 그이의 성연이에 대한 애정이었다.
비록 영세한 장학회지만 설립된 지 15년이 되는 오늘 수많은 장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 가슴이 뿌듯하다. 부자는 아니라도 우리가 힘들어 모은 재산의 일부를 남을 위해 쓸 수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 장학금을 수여할 때 마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고 한 말을 되새기며 남편의 큰 뜻을 늘 고맙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