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은 나 보통 사람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선을 치른 대통령답게 서류가방도 비서가 아니고 본인이 직접 들고 다니는 등 초반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친인척 기용을 하지 않겠다는 초반의 약속은 흐지부지 되어 4공과 5공 인물을 기용하고 특히 당의 개혁 위원장도 5공 중진을 임명해서 여론이 좋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는 북방외교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탈냉전시대의 개막을 촉진시켰고, 그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힘입어 노 정권은 소련을 시작으로 전 공산권과의 국교수립 정책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한 정책구상의 이면에는 당시 김종휘 정무수석의 공로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출간된 박철언 의원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 의원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있다. 김 수석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국방대학원 교수로서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한 유능한 국제정치학 박사였다.
1990년 6월 3일 한・소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때 엄청나게 변화된 국제정치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물론 국교수립의 대가로 상당한 차관을 공여했고 그 후 그와 관련된 문제가 복잡하게 전개되었지만….
같은 해, 6・25전쟁 40주년을 기해 탈냉전의 배경과 전망에 대한 세미나 같은 다양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새로 공개된 역사적 사료를 통해 6・25 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서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사실, 또 소련이 비밀리에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 등 새로운 정보에 접할 수가 있었다.
한편 노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두환 정권시절에도 보지 못하던 극렬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5공화국보다 민주화된 사회인데도 학생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고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또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력 시위에 공권력은 무기력했다. 7년간의 시끄러운 5공화국을 보내고 모처럼 안정을 희구하던 다수의 일반국민은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정부를 원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물태우”라는 말도 돌았다.
1988년 올림픽 개최 이래 학생들이 ‘반쪽 올림픽은 치욕스럽다’는 구호를 내걸고 데모를 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치른 감격에 빠진 일반국민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89년 3월 26일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호칭을 썼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어찌 남한은 독재라고 비판하면서 진정 독재자인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했을까. 나에게는 미스터리다. 문 목사의 부친은 남편의 고향 김천 황금동 교회 목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문 목사 부친뿐 아니라 그 형제들도 시댁식구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문 목사의 방북뉴스를 들은 시어머님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 그럴 분이 아닌데 하며 몹시 아쉬워했다. 이 사건은 당시 젊은이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황금동교회의 장로가 된 남편은 역대 목사님 사진을 걸기로 했을 때 유독 문 목사 부친의 사진만이 없어서 문동환 의원 (문목사 동생)을 통해서 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 각하를 잠시라도 만나는 영광을…”이라고 방북 신청 편지에 썼다는 보도를 읽고 정말로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해 7월 서경원 의원과 외국어 대학의 임수경 학생이 각각 당국의 승인 없이 입북한 뉴스가 또한 국민을 불안하게 했던 일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울교육대학에서도 한 학생이 분신자살을 기도했을 때 누군가가 불을 그어댔으나 그 학생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 그 학생 아버지가 시신을 화장한다니까 민족을 위해 죽었는데 그것도 모르냐며 “이런 새끼가 다 있어!”라고 무례한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 등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된 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들이 인질로 가둔 경찰 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한 사건도 이 시기의 불행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경찰 조사결과 교내에는 화염병과 좌익구호 선전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교수들은 “간섭하면 죽는다”는 학생들의 극언 때문에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목원대학에서는 교수가 학생에 의해 구타를 당해 고막이 터진 일도 보도되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시기였다. 특히 당국의 체포대상인 전대협 회장이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자회견을 버젓이 하는 때였다. 야당이 요구한 문교부 대외비 자료가 전교조 집행부 손에 들어가 있다는 등 시국이 극도로 뒤숭숭했고 연일 노학 연계시위를 통해 국보법 폐지 등을 외치며 화염병, 쇠파이프와 최루탄이 뒤엉켜, 지나가는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고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되어 울상들이었다. 시국이 흉흉해도 정부의 공권력은 완전히 무기력해 보였다.
1991년 5월 1일 전남대 여학생과 안동대 학생이 분실자살을 기도하다가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나오는 등 연일 여기저기에서 분신자살 소동에 관한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이해 명지대 학생시위 도중 전경 5명이 도망가는 강경대 학생을 쇠파이프로 때려 사망케 한 사건이 터져 학생 시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마포서의 한 경관은 전경만 비난하는 상황에 실망하고, 화염병과 최루탄의 대치 속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회의를 느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그 해 5월 4일 동아일보는 서강대학 박홍 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박 총장은 “겉으로는 분신자살에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더 많은 희생을 바라는 계층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소련은 공산주의 실패를 외치고 있는데 한국 대학생들은 김일성 주체사상과 공산주의에 심취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목숨을 끊을 정도로 한국사회가 암울한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니… 나는 그들의 부모형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겼을 때도 없던 일이 아닌가. 베트남에서도 공산화되기 직전에 분신자살이 빈번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수한 운동권 학생 속에 불순세력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매우 우려되던 시기였다.
1991년 5월 홍콩 기자가 연대 앞에서 분신자살하려는 여학생을 구하려고 하자 한 대학생이 뒤에서 자기를 끌어당기더라는 기사도 섬뜩한 것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분신하자 김지하 씨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