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공화국의 말로
새로운 정부 출범과 더불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말도 많던 7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전 대통령은 버티고 버티다가 할 수 없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재산 헌납하고 끝내 백담사로 떠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7년간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난도질을 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단임제 선례를 남겼다는 점, 초반에 좋은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밖에 부하에 대한 의리와 통이 크다는 점, 좋은 아이디어는 즉석에서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라고 평가하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었다. 그러나 그런 요소만으로는 역사에 남는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는 본인과 처가 쪽 친인척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할 용기가 부족해 불필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가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 7년간은,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해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간이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박정수가 회장이라고 해서 친목단체인 구미동창회가 해체되고, 남편이 발간해온 정치행정지가 폐간 당하고, 공천을 약속해놓고 헌신짝같이 배신당하고, 대통령의 친인척에 의해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기억들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13대 총선과 당선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정당간의 선거구제에 관한 협상의 지연으로 총선거일을 선거 한 달 전에 결정했다. 즉, 88년 4월 26일에 치를 13대 총선 날짜를 3월 16일에 발표를 한 것이다. 그야말로 후진국형 정치현실이었다. 선거 일자를 2월이라고 했다가 3월로 연기했다가 결국 4월에 치르게 되어서 할 수 없이 휴강을 하고 지역구로 내려갔다.
어떤 루머가 있어도 이번에 박 박사를 공천할 테니 동요하지 말라는 김윤환 의원의 다짐이 있어서 일단 안심은 했다. 3월 16일 새벽 모 신문 기자가 전화를 걸어 “두 분이 축배 들고 주무시라”고 하면서도 우리 지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 보좌관이 팔레스호텔 112호실에 공천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함으로써 그동안 언론에 혹은 구전으로 돌던 루머를 진정시켰다. 공천과정이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역시 당 중진들이 제각기 자기 사람들을 미는 과정에서 누가 더 강력하냐에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자격이 있다 해도 탈락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소속이어서 사조직만으로 세 번 선거를 치렀던 우리는 여당 공천을 받고 내려가 보니 과거 후보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당후보인 만큼 '돈을 풀어야한다'는 유권자의 기대심리 때문에 힘이 들었다.
또 몇 명의 민정당 참모들이 비협조적이어서 그들을 달래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어 초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78년부터 남편을 꾸준히, 조건 없이, 충실히 지지해온 사조직과 당 조직을 신속히 2중 구조로 정비해서 전체적으로는 무사히 선거를 마칠 수가 있었다.
선거 3일 전인 4월 23일 미국의 아들로부터 김천으로 전화가 왔다. 며느리가 그곳 시간으로 새벽 5시 45분에 첫 아들을 순산했다는 희소식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던 날인데도 다음날 선거운동을 위해 순간적으로 교차되는 만감을 잠시 접어두고 스케줄 짜느라고 바빴다. 선거 결과를 알 때까지 손자가 태어났다는 발표를 유보하라는 참모들의 권유에 따라 비밀로 했다.
3일 후 다행히 남편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어 아주 오랜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겹경사를 허락해 주셨다. 처음으로 여당 공천을 받고 치른 선거에서 남편은 63.9%의 지지를 얻어냈다. 남편의 개인적인 지지도에 여당의 조직력 그리고 당시의 여촌야도(與村野都) 추세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고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았다.
박정수 개인을 좋아하고 지지한 유권자들과 참모들은 세 번씩이나 무소속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면서 온갖 제약과 여당의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늘 남편에게 제발 여당 공천을 받으라고 요구해왔다. 따라서 그들은 네 번째 치르는 13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무소속의 서러움을 씻을 수가 있어서 기쁘다고 야단들이었다. 물론 남편은 10, 11대 중선거구제 총선에서 무소속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1등을 차지하는 영예를 차지했었다.
그 해 말 박준규 의장이 민정당 대표로 부임하게 되자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10대 선거에서 남편이 박 대표의 처남인 백남억 의장을 패배시킨 이력 때문에 혹시 남편에게 불이익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박 의장에게 그런 나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나는 그런 소인이 아니다” “박 의원은 영어도 잘하고 유머도 풍부해서 같이 일하기 쉽고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