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그날 밤 평생의 동반자가 될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그 후로 우리가 결혼하기 까지는 7년이 걸렸으니 어떻게 보면 무모한 용기이며 약속이었다. 공부밖에 모르던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불가사의하다. 물론 그이가 대쉬해 왔기에 우리의 관계가 급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훗날 나는 친구들에게 “내 성격에 그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노처녀로 늙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늘 그이가 고마웠다. 나는 포부는 컸지만 비교적 내성적이었다. 그이는 외향적인데다가 대망의 꿈을 안은, 불가능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각기 성향이 다른 두 남녀, 이범준과 박정수 사이에 사랑이 싹튼 것이다.
우리 사이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이는 외향적인데다가 여자 친구가 많아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질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나는 공부벌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다른 일은 모르는 모범생이었다. 그 때문에 여고 졸업반인 내가 연애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며 놀려댔다.
우리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나는 불안했다. 그이 곁에는 항상 여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농담도 잘해 좌중을 웃기기도 하고, 여학생들의 심부름도 앞장섰다. 그럼에도 그런 그이에게 자꾸 끌렸다. 내 성격과 정 반 대의 사람이어서 매력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한참 학업에 열중해야 할 10대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는 자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때면 낫킹 콜 (Natking Cole)의 “Too young”註이라는 노래를 합창하며 기분을 돋우곤 했다.
그이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무척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의 목소리 또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자꾸만, 자꾸만 그에게 끌렸다. 온통 머릿속이 그이 생각으로 가득 찬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정신을 못 차려 학업에 소홀한 그런 학생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남들이 오랫동안 눈치를 못 채지 않았나 싶다.
유학을 제안받고
1952년 여고 졸업을 앞두고 세 명의 졸업반 대표가 박은혜 교장선생님(장덕수 선생님 사모님)댁으로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으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다음날 학교에서 6학년 담임이신 채린기 생물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이 부르신다”고 했다. 몹시 궁금해 하며 교장실로 갔다. 교장선생님은 평소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그 날은 너무나 따뜻한 표정으로 맞이해 주셨다. 궁금한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들었는데, 4년간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보내주면 집에서 여비는 대 줄 수 있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그럼은요. 오빠가 사업을 해서 얼마든지 보내 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꿈속이 아닌가 싶었다. 뛸 듯이 기뻤다. 오빠의 허락을 받지 않았으나 당시 오빠는 사업을 잘해서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여고 시절에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선생님 몇 분이 계시다. 2학년 담임인 이난숙 선생님(국어)은 늘 나에게 변호사가 되어 불우한 여성들의 대변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선생님은 키도 훤칠하고 피부색이 하얀 미인이셨다. 그래서 그 분이 웃을 때 코를 찡그리며 웃는 모습도 아름답게 보여서 나는 그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 되어 지금까지 그 버릇이 남아있고 덕분에 콧잔등에는 주름살이 생겼다.
불행히도 그분은 6·25 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다. 남편 따라 월북했다는 소문도 있다. 원순희 담임선생님(영어)은 다른 반에 지는 것을 싫어해서 방과 후 청소시간에도 무섭게 감시를 하셨다. 우리 반은 매주 일등을 했고 조회 때 마다 반장인 나는 앞에 나가 상을 탔다. 친구들은 담임선생님과 반장이 닮았다고 했다. 그때 나의 별명은 ‘도토리 반장’이었다.
가장 마음에 담고 있는 은사는 채린기 담임선생님이다. 생물을 가르친 채 선생님은 잎사귀를 솔로 두들겨서 그 속의 앙상한 줄기만 남기는 실습을 할 때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범준아, 너는 하는 짓이 얼굴 같지 않고 어찌 네 이름 같으냐.” 나는 그 말씀을 인상은 여성적인데, 일은 거칠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그 후 매사에 조심하게 되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전혜린의 모습
어느 날 미남이시던 선생님이 느닷없이 머리를 거의 밀다시피 하셨다.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던 학생들 가운데 고인이 된 전혜린도 있었다. 선생님 댁 근처에 가서 지켜보았는데, 선생님이 물 지개를 질 때 머리가 흘러내려서 깎은 것 같다고 안타깝게 말하던 혜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순애 선생님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분이다. 첫 음악 시간에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이 나오자 “우리 형부 이름과 같네. 꼭 남자 이름이야” 하셨다. 감성이 풍부한 분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우리의 조그마한 실수에도 야단을 치며 피아노 건반을 마구 두들겼다. 결혼 후 김순애 선생님이 그이 사촌형님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촌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김 선생님은 바리톤 성악가인 김형로 선생님과 재혼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채린기 선생님과 김순애 선생님은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여고시절 스승과 제자가 같은 캠퍼스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니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註 They try to tell us we're too young. Too young to really be in love. They say that love's a word, a word we've only heard, but can't begin to know the meaning of. And yet we're not too young to know. This love will last though years may go. And then they may recall, we were not too young at a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