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대통령 후보 간의 사파전이 오래 전부터 전개되었고 나라도 4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무소속 의원이 자기 실력과 포부를 펴보기란 너무 힘들다는 것을 10대, 11대 국회에서 체험을 했기 때문에 정당 공천을 희망했다.
공화당에서는 양찬우 의원, 구자춘 시장, 이희일 장관, 한병기 의원 등을 통해 입당을 종용했다. 노태우 후보의 처남인 김복동씨가 조직한 수요동우회라는 모임에 남편이 자연스럽게 동참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문태갑 의원, 김성진 장관, 한갑수 의원, 김선길 박사 등 평소에 잘 아는 분들이 모였다고 했다.
김윤환 의원의 간곡한 입당 권유로 남편은 민정당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을 비롯해서 미국에 있는 아들, 조카, 나를 포함해서 가족 전부는 기독교인인 김영삼 씨가 이끄는 민주당을 선호했다. 12대 선거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민정당이냐며 이번 선거에서 부정선거 시비 가능성도 있을 테니 한번 갈아보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물론 야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월 28일 불행히도 민주당이 분열되어 김대중 후보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새로 창당되었다. 그러자 남편은 1) YS와 DJ간의 야당표 분산은 선거에 불리하다는 점, 2) 노 후보는 5공 정책결정에 개입하지 않았고 6・29 선언의 용단을 내린 사람이라는 점, 3) 공화당과 민정당만이 입당 권유한 사실은 자기를 여당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점, 4) 민주당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자신의 최종 결정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남편의 육감이 맞았는지, 과연 민주당이 11월 11일 우리 지역구인 김천에 우리는 잘 모르는 김의철이라는 사람을 공천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청와대의 이진우 수석과 김윤환 의원의 권유를 수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김천 참모들 가운데는 그렇게 서러움을 당하고도 민정당에 입당하느냐며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김천 시내를 왔다 갔다만 해도 당선될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분위기었다. 김천의 여론은 당시 YS가 우세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정보과에서 김천에서 그러한 여론을 역전시킬 수 있는 후보는 오로지 박정수 후보라고 상부에 올렸다는 말도 들었다.
입당이 기정사실화되자, 지역구 유권자들은 12대 선거에서 어이없이 상주에 두 의석을 빼앗겨 김천에는 대변인을 배출하지 못했던 불행한 경험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누가 되든 지역구 의원은 박정수라는 분위기었다.
그 이는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몇 년의 공백 끝 (12대 선거 낙선)에 지역구로 내려가서 각 면사무실의 하위직 공무원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모두 다시 돌아온 그이를 대환영해주는 분위기가 고마웠다. 10, 11대 현역일 때도 고압적인 태도가 아닌 서민적인 인품을 보인 남편을, 그들은 그렇게 좋아했다.
13대 국회의원 공천을 받는 과정에서도 해프닝이 있었다. 88년 정권이양 전까지는 법적으로 5공화국이 집권세력이므로 대통령 인척인 김천・상주 지역 현역의원의 위력은 여전히 당당했다. 박정수의 공천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김상구 의원의 주장 때문에 우리 참모들이 안타까워서 계속 연락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이진우 수석과 김윤환 의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다짐해 주었다.
김천에서 민정당과 박정수 사조직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허위보고를 청와대에 올리는 등 방해공작이 계속되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1구 2인 선출인 중선거구제가 1구 1인 선출인 소선거구제로 바뀌게 되어서 상주와 김천이 분리되었다. 따라서 상주 출신인 현역의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무슨 원한이 그리도 깊은지 끝까지 반발을 했다는 것이다. 남편과 그 사람은 전생에 철천지원수였나? 하는 생각을 다 해보았다.
11월 26일 민정당의 정석모 사무총장과 김태호 사무차장은 김 의원의 반발이 만만치 않으니 박 후보는 지역구에 가지 말고 원격지원만 하라는 상식밖의 지시를 했다. 자존심이 상한 남편은 김윤환 의원에게 입당 취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그는 자기만 믿으라고 달래는 전화를 우리 집으로 두 번이나 했다.
결국 남편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누어 온 김 의원을 따라 민정당에 입당함으로써 무소속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실은 노태우 후보가 결정된 직후부터 김 의원이 남편을 만날 때마다 당에 들어와서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를 했다고 들었다. 같은 경북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한국정치에 대한 야망을 같이 펴보자는 이야기로 의기투합하곤 한 사이였다고 한다.
선거운동 기간 중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YS가 선두에서 리드한다고 예측했고 일본 매스컴은 노후보가 앞서고 있다는 예견을 했다. 결과는 노후보가 36%, YS가 28%, DJ가 27%, 그리고 JP가 8%의 득표율을 보였다.
12월 초 전주에서의 폭력사태 이후 노 후보 지지율이 올라갔다는 분석이 있었다. YS가 패한 것은 초반 깨끗한 이미지로 지지도가 오르다가 이념적인 색채를 불문하고 마구 제휴하는 바람에 표가 떨어져 나갔다는 평가가 있었다. YS가 군정종식을 부르짖으면서도 육해공 총장 예비역 장성들을 입당시킨 점, 특히 백기완 씨와의 제휴로 민중연합정부 수립, 케렌스키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 결정타였다고 한 매스컴은 분석했다.
당시 대통령 선거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서울 정도의 지역감정을 노정시켰다는 사실이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특정 지역민에게는 주유를 안 해준다든지, 식당에서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하면 음식도 팔지 않는다든지, 택시기사가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 손님이 비방을 하면 도중에 하차를 강요한다든지, 유치원에서까지 부모들이 지지하는 후보 편을 들어 서로 싸운다든지 등등 해괴망측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선거였다.
나는 젊은 20대를 외국에서 지내서인지 지역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그러나 솔직히 1987년 대선을 통해서 이것이 바로 ’망국적인 지역감정‘ 임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