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도 주한 외교사절들과의 친분을 계속해 왔다. 특히 역대 주한 미국대사 부부들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워커(Dixie Walker) 대사는 사우스 캐로라이나 대학 교수 당시인 l966년 수원에서 개최된 공산주의에 대한 세미나에서 처음 만난 이래로 친분을 유지해 온 사이다. 그때 나는 이화여대 교수 자격으로, 남편은 총리실을 대표해서 그 세미나에 참석했다.
워커 교수가 한국에 대사로 부임한 후, 내가 수원 세미나에서 자기 논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1986년 남편이 워커 대사에게 미국 독립기념 리셉션에 두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를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였는지는 1986년 7월 4일 미국독립 기념 리셉션에 두 분이 초대되어 우리부부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약 1천500명이 참석했다고 하며 후일 워커 대사는 그때 무척 긴장이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다음날 조간에는 야당 지도자들을 초대한 데 대한 항의로 총리와 외무장관이 불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오늘날에 비교해볼 때 격세지감이 드는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편의 몸은 학교에, 마음은 정치와 선거구인 김천에 가 있었다. 주말마다 김천 황금동교회로 예배를 보러 내려가서 나는 그때도 주말 과부로 지내야 했다.
이숙종 성신학원장 별세
85년 6월 18일 나와는 인연이 깊은 이숙종 성신학원장이 숙환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박사 생각만 하면 안타깝다. 너무나 준비 없이 가셨기 때문이다. 82년 내가 성신에 부임했을 때부터, 이 박사에게 평생을 여성교육과 여성권익을 위해 결혼도 안하고 몸 바치셨으니 시간 날 때마다 살아온 발자취를 녹음해놓으면 나라도 책으로 엮을 수 있다고 권유를 했다. 그럴 때마다 학원장님은 “나는 오래 살 거야”라고 해서 몇 번 말씀드리다가 기권했다. 당신 이후의 학교에 대한 구상을 전혀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다.
9대 국회에서도 학원장님은 나에게 의지가 되었던 분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나 대결을 싫어하신 분이며 매사를 조용히 해결하려는 성품이었다. 그 분 곁에서 같이 뛴 사람으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9대 국회의 가족법 개정도 그 분이 있어서 여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원장님이 가고 없는 성신 캠퍼스가 허전하게 느껴져서 한동안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을 눈물겹게 아끼고 사랑한 성신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김활란 박사를 잃은 후 또 한 분의 여성 지도자가 이 나라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두 분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진 중진 여성 지도자를 아직 찾을 수가 없다. 그 후 여성계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이태영 박사도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6・29 선언
1987년 정초 평소 남편이 아끼고 좋아한 강현중 변호사 내외와 같이 63빌딩 일식당에서 오찬을 하며 나라 걱정을 했다. 그리고 강원용 목사님 댁으로 세배를 갔다. 목사님은 “금년은 위기와 기회의 해가 될 것 같다”고 말씀을 꺼내시더니 합의 개헌, 과도정부 수립, 싹쓸이, 군부 쿠데타 등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해서 민주화를 위한 국민의 개헌요구를 무시하고 호헌을 선언하는 TV 담화를 발표하자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 당시 분위기로서는 선거도 치르지 않을 듯했다. 어차피 단임제인데 물러날 대통령이 왜 굳이 그러한 무리수를 두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정권수립과정에 대한 정통성 결여가 국민의 저항을 초래한 정권이라면, 국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통치수단의 정통성이라도 인정받는 정책결정을 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국민의 반발을 유발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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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경향신문 1987. 4.13.) 이 호헌선언은 국민적 저항(6.10항쟁)을 불러와 결국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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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앉기만 하면 나라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이는 “뭔가 터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고 나는 늘 원천봉쇄에 익숙한 정부이니 또 어떻게 넘어가는 것 아니겠냐는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이 예감이 맞았다. 4.13 호헌담화 반대 시위가 것 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각 대학교수, 언론인, 종교인들의 시국선언이 연이었다. 민정당은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지명하고 정권이양과 88 올림픽 이후에 개헌논의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국민은 올림픽 전에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기 위한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데 여당의 시국분석은 너무나도 안일하고 여론과 거리가 멀었다.
6월 29일 월요일은 54세가 되는 나의 생일이었다. 바로 그 날 오전 10시 노태우 대표를 통해 한국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대통령 직선제, 언론의 자유 등 민주화를 위한 8개 항목이 발표되었다. 그이가 “뭔가 꽉 막혔던 것이 확 풀린 기분이지?”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 민주정치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6・29 선언이다.
이것이야 말로 ‘국민의 힘’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하겠다. 이렇게 쉽게 풀릴 일을 왜 그동안 정국을 혼미에 빠뜨리고 많은 희생자들을 내야 했을까?
그 날 저녁 김영수 사장이 우리 내외를 힐튼호텔 오크 룸으로 불러내 나의 생일과 6・29 선언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