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 선거 낙선 (52회)

선거 전날인 2월 11일 오후 집집마다 유인물이 뿌려졌다. 박정수가 통일교의 돈으로 선거운동을 한다는 내용으로 교회 지지표를 깎기 위한 것이다. 변명할 시간적 기회를 박탈하기 위한 야비한 방법이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아파트로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런 부정선거, 공포 분위기 속에서는 우리의 낙선은 불 보듯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해진 내가 넋을 잃고 있는데 여주기 권사님 자매(그이와 초등학교 동창)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 사실을 듣고 울며 위로의 기도를 해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참히 당한 사람의 호소를 듣지 않으셨다.

2월 12일 선거일에 투표를 마치고 늘 그러했듯이 상주지역을 며느리와 함께 돌아다녀 보았다. 선거 때마다 수고해준 정 장로는 민정당의 압력이 너무 심해서 참관인도 구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재옥 후보의 참관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상주는 김 후보의 단독 아성이었다.

우리와는 가족 같이 가까운 분이 상주의 초등학교 교장인데 그전 선거에서 우리를 지지했다고 교육감과 면장의 감시 하에 있다고 했다. 내가 방문하면 그 분이 파출소에 연행될 것 같아서 그 댁을 방문하지 않고 돌아왔다.

김천으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고 하고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잊으려 했다. 새벽에 낙선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몸에 감각을 잃고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주영이는 혼자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지 한 달만의 경험이어서 충격이 컸을 것이다. 운동원들은 새벽 6시까지 두 번째로 리드를 했는데 갑자기 뒤집혔다고 막판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했다. 김 후보가 예견한대로 압도적으로 1위, 같은 상주 출신인 이재옥 후보가 2위, 그리고 근소한 차로 그이가 3위가 되었다.

우리는 곧 체념했다. 이틀간 그이가 확성기로 부족한 탓으로 낙선되었지만 지지해준 유권자에게 감사드린다고 자동차를 타고 김천시를 누비고 다녔다. 한승헌 변호사가 후일 말해주는데 그때 자기가 김천형무소에서 박 의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이 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울면서 손을 흔들어댔다. 도처에서 “박정수는 당연히 되는 줄 알았다” “김천사람들이 등신이야” “국회의원을 두 사람 다 상주에 뺏기다니”하고 자성의 목소리가 컸다. 순진한 시골 유권자 중에는 대통령 동서가 당선되면 김천이 마치 하루아침에 서울이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 선거운동 기간에 경로당을 방문한 박정수 후보

사무실에 모인 운동원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투표 전날 밤 구책뿐 아니라 동책 집에서까지 형사가 아니면 면 직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손발이 묶여 전혀 선거운동을 못했다는 것이다. 부항면의 박운재씨는 형사가 잠이 든 사이에 동책 집에 가니 겁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더라며 한없이 우는 것이다.

모두 이번 선거같이 우리 운동원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 김 후보의 표가 안 나오는 투표구에는 불이익이 갈 것이라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부정선거는 처음이라고 했다. 재검표를 요구하며 김천에서 제2의 4・19 혁명을 일으키자고 흥분하는 운동원들을 진정시키며 󰡐사필귀정󰡑이니 참고 기다리자고 설득했다. 나는 속으로 운동원들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침묵했다.

참모들에 의하면 우리 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에 대한 유례없는 탄압의 근본적인 원인은 김 후보가 안동의 권정달 후보와 전국 득표율 1등 경쟁 때문에 생긴 무리수라느니, 상주도 아닌 김천 출신 박정수를 견제목표로 삼은 것은 기왕이면 3선 의원보다는 초선의원이 당선되기를 바라는 민정당 후보의 욕심 때문이라느니, 막상 당선된 후에는 김천 예산을 상주로 다 갖고 갔다느니, 김천시내 복개공사가 예산부족 때문인데도 민정당은 몰표를 안주어서라는 구실을 내 세운다느니, 선거후 온갖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런 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우리는 깨끗이 선거결과에 승복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운명인 만큼 빨리 잊어버리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10년 전 뇌암으로 잃은 딸 대신에 하나님께서 착한 주영이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니 그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자고 그이는 말했다. 선거에서 이겨도 며느리가 집안에 잘못 들어오면 더 큰 시련이 아니겠느냐고 자위하면서.

성우가 미국에서 전화를 했다. 아버지와 주영이에게는 점잖게 위로의 말을 하더니 나와의 통화에서는 울먹이며 아빠의 건강을 걱정했다. 우리 세 식구를 환송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나온 지지자들이 다음 선거에 꼭 출마해야 한다며 울먹이느라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김천을 떠날 때는 중앙시장 부인들이 모두 나와서 배웅해주었다.

서울 역에 도착한 우리 셋은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마중 나온 사돈댁 내외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혼사 직후 시댁의 낙선이라는 불운을 혹시 새 식구가 잘못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했는지 며느리를 사이에 두고 시부모가 손잡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