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있는 그이를 서울IPU 총회 유치에 공헌했다고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렀다. 한 시간 이상 대담을 나누었다고 했다. “11대 때는 내가 잘 몰랐는데 이번에는 꼭 박 의원에게 공천을 주겠다”고 대통령이 약속을 했으니 다음 선거는 좀 편하게 치르게 될 것 같다며 그는 정치에서 손 떼자고 조르는 나를 달랬다. 믿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전 대통령을 만나보니 성격이 화끈해서 한번 약속을 하면 지킬 사람 같이 보였으니 믿어보자며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그분의 말을 철통같이 믿고 오로지 지역구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선거가 있기 전 해인 84년 9월부터 김천·상주 지역은 김상구 주 호주 대사를 내정했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김 대사는 전두환 대통령의 막내동서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그이와의 약속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친인척에게 공천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선거기간 내내 김 씨를 겪어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지역구에서는 민정당의 현역의원인 정휘동씨가 민정당에 대한 자기의 재정적 공헌이 크기 때문에 공천은 자기가 받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상구 씨가 내정되었다는 공식발표가 보도되었다. 정 의원의 재력도 대통령 동서 앞에서는 당할 재간이 없었나보다.
우리 선거운동원들은 그동안 맨발로 뛰어왔는데 신발을 준다기에 (대통령의 약속) 이번에는 편하게 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안준다면 다시 맨발로 뛰면 된다고 그이에게 무소속 출마를 종용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상황에 환멸을 느낀 그이는 출마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아들의 결혼 날짜를 12월 27일로 잡았다.
성우는 16살 때 죽은 동생이 앓던 심한 천식증세가 나타났다. 놀란 우리는 환경을 바꾸는 길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대로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국회의원의 아들이라고 해서 청와대의 양해까지 구해야 했다. 미국에 데려다 놓고 서로 한없이 울며 헤어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서 장가갈 나이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마치고 아버지가 졸업한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타운 외교대학에 입학해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성우는 법학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데 3년간 학비를 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자식이 하나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지막 학년 때 그이가 12대 총선에서 낙선해서 학비를 보내주지 못했다. 성우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졸업을 한 후 조금씩 갚았다고 한다. 외교학 학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 연세대 대학원에서 1년간 수강하고 조지타운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수강하는 동안 사촌누나가 소개한 규수(이주영)를 만나서 결혼을 하기로 하고 데이트를 시작했다. 주영이는 이화여대 수학과 졸업생으로 아버님은 대법원 행정처장을 거쳐 노태우 대통령 말기 중립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낸 분이다. 알고 보니 그 집과는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나의 부산피난 시절 여고 5학년 때 세든 집에, 진주에서 온 피난민 가정이 있었다. 그 집 식구중의 한 남자가 늘 목욕탕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분이 주영이의 큰 아버지이며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이다. 하여간 본인들이 좋아해서 성우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성우도 주영이도 외동아들, 외동딸이어서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동갑짜리끼리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맺어주었다.
주영이는 불교가정이지만 신랑 집의 종교에 따라 경동교회에서 강원용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강 목사님은 2대째 주례를 맡아 주신 것이다. 50년대 우리 결혼식 순서대로 준비를 했다. 들러리는 우리 때는 세 명이었으나 두 명으로 했다. 연세대학교 음대 졸업반인 최진호 군(현재 테너로 활동)이 Because You Come To Me를 불렀고 주기도문은 유명한 소프라노 이규도 이화여대 교수가 불러주어서 영광스러웠다.
하지만 그날 찍은 결혼사진이 기대한대로 나오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원 스트디오의 신 사장에게 전날 밤 미국에서 찍은 우리 사진첩을 보여주면서 그대로 해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전두환 대통령의 아드님 결혼식에 차출이 되어서 우리 교회에는 다른 기사를 보내게 되어서 솜씨가 서툴었다고 사과를 했다. 1984년은 전 대통령과 악연의 해였다. 알리지도 않았는데 김천 지역구민이 몇 대의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결혼이란 숙명적인 연분이 있어야 하는가보다. 성우가 유난히 일찍 결혼하고 싶어 해서 여러 신부감을 만나게 해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를 고른다는 생각에 무척 신경을 썼다. 성우는 예쁜 색시를 원하는 것 같아서 “배우자란 같이 살다보면 얼굴은 안보이고 성격이 더 돋보이는 법이니 성품을 봐야한다” “결혼은 두 남녀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가정의 결합인 만큼 신부가 성장한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는 등 장래 시어머니로서의 전형적인 신부관을 말해주면 성우는 우선 외모에 끌려야 한다고 20대 초반의 어린 신랑감다운 주장을 했다.
우리부부도 23세, 24세 때 결혼을 했지만 아들도 24세에 동갑내기와 결혼을 했다. 며느리인 주영이도 쟁쟁한 신랑감을 많이 만나보았으나 결국 성우가 짝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시어머니 되는 내가 엄하게 보여서 모두 우리 주영이를 동정한다는 말을 들었다. 결혼한 후 주영이는 “어머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겉만 보고 무서운 시어머니일 거라고 하는데 사실은 안 그러시니까 손해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늘 딱딱한 외모 때문에 실제로 손해를 많이 보는 편이다. 가까이 사귀는 친구들은 나에게 외강내유라는 평을 해준다. 실속이 없다는 것이다.
외모는 타고난 것이어서 바꿀 수가 없으니 유감이다. 사실 나는 마음이 약한 편인데 내 마음과 외모가 일치되지 않는가 보다. 나의 첫 정치학박사 제자인 권경희(지금 동원대학 교수)가 조교로 있을 때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고는 다시 불러서 다독거려주는 나를 보고 마음이 약하다고 평하곤 했다.
모두 며느리를 맞이하면 아들을 빼앗기는 기분이 든다고들 하지만 주영이가 내 아들을 나 대신에 챙겨 줄 것이어서 오히려 내 어깨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성우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일 아침 나의 첫 일과가 아들에게 편지 쓰는 일이었다. 편지 쓸 때는 한글 옆에 괄호를 하고 한문을 써 주었더니 그것이 성우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라 늘 대화하듯 이곳 소식, 우리의 경험담과 덕담 등을 조금씩 적어 보냈다. 그래서인지 방학에 나와도 밀린 이야기 꺼리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하고나니 며느리가 부담을 느낄 것 같아서 편지 쓰기를 삼가게 되었다.
성우가 고등학교 때 목걸이를 하고 귀국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매사에 아들을 지나칠 정도로 엄하게 기른 것 같아서 후회할 때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객지에 나가 홀로 지낸 것 치고는 아주 잘 자라주어서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피아노, 노래, 운동에도 재주가 있고, 대인관계도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드디어 한 여성의 어엿한 남편이 된 것이다. 결혼식 날 아들 부부도 아빠 엄마와 같이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