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 희한한 경험을 학장이 된 후에 겪었다. 사회과학 대학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여자대학이면서도 사회대 건물에 거울이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 화장품회사에 섭외를 했다. 라미화장품의 강신호 회장과 쥬리아의 장익용 회장으로부터 광고비로 그때 돈 60만원을 얻어냈고 사회대 건물에 비치할 큰 거울 10개를 기증받았다.
그 거울이 도착한 날 아침 학교에 갔더니 사회대 학생임원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학장실로 와서 하는 말이 아침 일찍 “학장님 감사합니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붙여놓았더니 총무처장이 와서 다 떼라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현수막이 없어도 너희들이 기쁘고 고마워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하고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그 후 나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누군가가 거울 몇 개를 대학원과 행정관으로 옮겨놓았다.
학장으로 있을 때, 학부에 신설된 지 2년 만에 대학원에 정외과와 경영학과 신설 인가를 교육부로부터 받아냈다. 비록 성신 졸업생들은 아직은 없어도 외부학생들이 학위를 위해 대학원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당시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될 때 돈암동 지하철에 성신여대 입구 표기를 하기 위한 로비도 이숙종 학원장이 부탁했다. 그 당위성을 적어서 시청에 제출한 후 남편의 고교동기인 염보현 시장에게 부탁을 했으나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실무진이 연구 중이라는 답이었다.
그러다가 85년 남편이 12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 염 시장 내외와 다른 동기 내외들이 베푼 위로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염 시장이 나에게 “남편은 낙선되었지만 성신여대 입구라는 표기를 하도록 결정했으니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세요”라고 말했다. 즉각 학원장님께 알려드렸고 학교에서는 후속조치를 위한 준비에 바빴다. 염 시장이 염려했듯이 그 후 한성, 숙대 등 타 대학의 항의가 빗발쳐서 차차 대학 이름을 지하철 입구에 표기하게 되었다.
9대 국회의원에서 성신여대 교수로 부임한 초반에는 시련을 겪었으나 그래도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스승의 날 강의실에 들어가면 학생들이 꽃다발을 탁자에 올려놓고 “…보답하리…스승의 은혜”라는 스승의 노래를 불러 줄 때면 콧대가 찡할 정도로 감격하고 감동하는 순간들이었다.
졸업 후 제자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을 때, 취직시험에 합격했거나 대학원 진학을 알려올 때 등 보람을 느끼게 한 순간들은 수없이 많았다.
학교 일로, 남편 일로, 집안 일로 나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시아버님이 입원하신 것이다. 90세 연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멋쟁이이신 아버님은 정월 초 이틋날 넥타이를 매고 노인대학으로 향하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얼음판에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서졌다. 동부 이촌동의 금강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8시간의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그 날부터 4월 14일 운명하신 날까지 학교에서 병원으로 퇴근을 해야 했다. 다행히 80대 초의 시어머님이 건강하신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님은 건강을 위해서 내가 사드린 만보기를 늘 허리에 차고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니셨다. 그런 분이 몇 달을 병원에 누워계셔서 합병증이 생겼다.
시아버님은 너무나도 순진무고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셨다. 노래도 잘 하시고 친구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늘 외출하면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어머님이 불만이셨다. 반면 아버님은 평안도 기질을 가진 어머님의 무뚝뚝한 성품에 불만이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께 다정다감한 몸짓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님을 위한 애정의 표시를 맛있는 음식 장만으로 하시는 것 같았다. 남편을 거두어 드리는 일에 그렇게 정성을 쏟는 분은 처음 보았다. 몇 십 년 두 분을 모시고 살면서 그런 점을 나도 은연중에 배우게 된 것 같다.
두 분을 보며 나는 남편이 아버지로부터는 사람을 좋아하고 남을 잘 믿는 낙천적인 점과 유머 감각과 느슨하면서도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을, 어머니로부터는 합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순발력을 닮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어머니가 자녀들을 엄하게 야단치고 매를 들면 아버님이 말리는 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근을, 어머니는 채찍을 균형 있게 행사하면서 8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셨다. 어머님의 뛰어난 외모와 내조는 소문이 나 있었다.
아버님은 4월초에 수술 후유증으로 퇴원한지 두 주일만에 숨을 거두셨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불꽃이 꺼져가듯 서서히 고통 없이 사그라져 가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버님은 복도 많으신 분이었다. 국제회의 참석차 외국에 나간 그이(넷째 아들)가 하루 전날 귀국했고 미국에서 사는 셋째 아들내외가 마침 서울을 방문 중이었으며 유학중의 성우도 마침 연세대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버님은 마지막으로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에 가셔서 당신이 좋아하는 스킨 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머리를 빗으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누워서 주위를 둘러싼 자녀들을 미소 지은 얼굴로 차례로 돌아보시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아버님 같은 줄만 알았다. 친정 부모님의 임종도, 내 딸 성연이의 마지막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약을 많이 들면 힘들게 운명한다는 속설도 틀린 이야기이다. 아버님은 봄, 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 손수 보약을 지어서 알약을 만들어 드셨다. 어머님은 그런 것을 싫어하는 편이어서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려고 몸에 좋다는 것은 잊지 않고 챙겨 드세요?”라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보약을 즐기지 않으셨던 어머님은 오히려 96세까지 수를 다하셨으니, 인간은 보약을 먹든 안 먹든 각자가 타고 난 운명에 의해 살다 이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막내인 나는 친정 부모님을 일찍 잃어서 30여 년간 모신 시부모님과 오히려 정이 더 들었다. 직장이 있는데도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갈수록 후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