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는 82년에 지병인 디스크가 도져서 허리에 벨트를 매고도 계속 가뭄지역을 찾아다니는 강행군을 하다가 그 해 가을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의원연맹 총회에 국회대표단으로 참석했다. 과거에는 공화당의 박준규 의원이 대표단장으로 참석했으나 5공화국 수립 이후 82년 가을 로마에서 열린 68차 IPU총회에는 민정당의 권정달 의원이 대표단장이 되었다. 그밖에 박정수(의정동우회 회장), 고정훈(의정동우회), 이봉모(국민당) 정선호(민정당) 의원들이 대표로 참석했다.
IPU 총회를 서울로 유치하고 싶어도 그동안 북한 때문에 감히 상정도 해보지 못했을 때였으나 82년에는 마침 83년도 총회 개최국이 결정되지 않아서 서울유치를 그이가 시도하자고 제의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과거 박준규 의원도 여러 번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다며 모두 ‘망신만 당하니 그만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이가 권정달 단장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승인만 받아달라”고 했고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그러나 북한의 반대로 IPU 사상 최초로 개최국 지정문제가 표결에 붙여졌다고 했다.
IPU의 테렌치오 (Terenzio) 사무총장은 공산권 국가 대표들과의 접촉에서 부정적인 반응이라고 통보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 대표단이 Ten Plus Group (유럽국가 그릅)의 간사인 서독의 해닝 (Henning)단장과 협의한 결과 이사회에 직접 상정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대표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1994. 1)에 실린 심양섭 정치부 기자의 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 기사에는 ‘낮은 목소리로, 빛이 나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정책대안을 만들고, 법률안 제ㆍ개정에 땀을 흘리는 일꾼들, 생산적이고 미래재향적인 정치에 승부를 건 정치인’으로 조순승과 박정수 의원을 꼽았다. 그에 앞서 80년 동베를린에서 열린 67차 IPU총회에서는 북한 측이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이유로 한국대표단을 IPU에서 축출하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하려고 공작하는 것을 사전 포착하고 저지시킨 일도 그이의 공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이가 총회 유치 의사를 표명하는 연설을 하고 나니 최수헌 북한 대표단장이 발언권을 얻어 의제와 관련 없는 미군철수를 거론하면서 한국은 인권유린의 나라이고 치안이 불안한 곳으로 그런 곳에서 어떻게 국제회의를 개최할 수 있느냐는 등 격렬하게 비난을 함으로써 각국의 반감을 유발했다고 한다.
한국 대표단은 북한의 근거 없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이를 내세웠다. 그이는 그런 내용의 원고를 손에 쥐고 단상으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남북이 서로 비방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회원국가들이 식상해서 모두 없던 일로 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준비한 원고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원고 없이 즉석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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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IPU 총회유치를 북한 대표가 반대 발언을 한 후 의사진행 발언을 청구하는 남편 (로마 총회에서) / 왼쪽부터 권정달, 고정훈, 박정수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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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제들이 이 자리에서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유감이다. 우리나라에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분이 한국에 와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형제국가인 북한도 언젠가 IPU총회를 평양으로 유치하고 싶다면 한국은 적극 지지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연설을 마치고 하단하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수많은 의원들이 그이에게 와서 “당신의 신사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고 남북이 대조가 되는 순간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남북대표간의 차이가 확연해지면서 회의장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뀐 것이다. 그날 그이가 외국 의원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쪽지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나도 보았다.
소련의 무조건 연기안, 스리랑카의 다음 이사회까지 연기하자는 안 등이 제의되었으나 모두 부결되었고 파나마 대표의 제안에 따라 거수 표결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호명투표를 요구해서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 82, 반대 32, 기권 24의 압도적 지지로 70차 총회의 서울 개최가 가결되었다.
그날 회의장 로비에서 만난 북한 대표가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그이에게 “당장 서울 유치안을 포기하지 않으면 후환(북한사람이 쓰는 용어)이 좋지 않을꺼요”라고 협박 투로 말했다고 한다. 국제의원연맹은 총회 개최지 결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관례가 있는데 이때 처음으로 정식표결에 부쳐졌다고 한다. 이 결의안이 통과되자 당시 로마의 주 이태리 안광호 대사를 비롯해서 대사관 직원들과 국회 대표단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고 한다.
83년 10월 4일 드디어 서울에서 IPU총회가 개막되었으나 불행히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 직후일 뿐 아니라 당시만 해도 냉전체제의 붕괴 이전이었기 때문에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75개국과 14개 국제기구 대표 900여명만이 참석했다.
서울 유치에 성공한 대표들이 연일 방송대담에 나왔다. 그럴 때 대표단장이 그이가 순발력 있는 판단과 설득력 있는 의사진행 발언으로 장내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데 기여를 했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했는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어서 조금 서운했다. 무소속의 설음은 이 일만이 아니었다.
총회 의장은 보통 주최국의 국회의장이 당연직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어서 채문식 의장이 개회사만 읽고 언어구사력 때문인지 무소속인 그이가 의장서리로 전체회의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닷새 후 각국 대표단과 가족들이 경주 관광에 나선 날 미얀마에서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전 대통령을 수행한 참모들 17명이 북한 공작원에 의한 폭파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전 달에 일어난 소련의 KAL007 격추사건 때문에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나는 국제회의도 다 잊고 며칠을 텔레비전 앞에서 바보같이 울며 시간을 보냈다. 전 대통령이 인재만큼은 잘 기용해서 그 17명이 모두 훌륭한 지도자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 가운데 성품이 온화한 함병춘 비서실장은 그이의 경기 동기이며 한 동네에서 살았고 또 선비형인 서상철 장관은 평소에 우리내외가 좋아한 분이었다. 대통령 일행이 떠나기 이틀 전에 경회루 연회장에서 서 장관이 나에게 한 말이 있다. “교수 출신들이 정계 경험을 쌓고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보장되어야 소신껏 일할 수가 있습니다. 이 박사께서 국회 임기도 끝났으니 대학으로 돌아가는 전례를 세워놓으십시오”라고 말했다. 며칠 후 랑군에서 터질 일도 모르고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를 생각했던 서장관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된다.
서울총회 참석자들은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탄테러사건에 경악해서 북한의 살인 만행을 규탄하고 진상을 규명하여 책임자를 의법처리 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