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은 김재규 부장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이다. 남편은 그날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일찍 귀가했다. 지나온 일들을 상기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왜 그리도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분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우리 지역구의 조직책이 정휘동 의원으로 결정이 난 후 우리는 출마할 의욕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망설이다 미루어둔 하버드 대학에서 온 서류를 작성하여 우송해버렸다. 마침 한미경제인협회의 다니엘 리 박사의 건의로 미국 콜로라도의 아스펜에서 개최되는 연례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리는 일주일간 책도 많이 읽고 매일 주어진 주제를 갖고 토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스펜에서 덴버로 가는 길은 지평선만이 보이는 끝도 없이 넓은 광야였다. 그곳에서 기계로 수학하는 농산물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넓은 광야를 바라보니 한국에서 노심초사하던 일들이 하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1980년 한 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확실성과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 해에 나의 사랑하는 셋째 언니도 이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 언니가 남겨놓고 간 어린 아들, 재원이가 지금은 어엿한 KBS의 아나운서로 성장해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이 되어 있다. 연극계의 대부이신 이해랑 선생님이 재원이 엄마를 무대에 세우려고 무척 애쓰셨고 본인도 원했으나 완고한 친정 어머니의 결사적인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52세에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남아있는 아들이 분야는 달라도 언니 대신 매스컴에 종사하게 되어 흐뭇하다.
1981년 우리 지역구에는 민정당은 정휘동 의원을, 민한당은 원래 내정되었던 이재옥씨 대신에 백 의장의 비서였던 한봉수 씨를 조직책으로 결정했다. 국민당에서는 남편의 입당을 종용했으나 그가 사양하면서 상주 출신을 후보로 천거했다. 그러나 국민당에서 상주에서는 후보를 낼 수 없는 사정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상주를 무풍지대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 남편의 불출마를 유도하는 배경에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진위여부는 모르나 떠도는 말로는 민정당이 모든 야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야당들을 어용야당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많았다.
공천과정과 관련하여 우병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우병규 수석은 우리와 함께 정치학회 회원이며 아카데믹한 분이어서 평소에 친분이 있었다. 우 박사에 의하면 그이가 규제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우 박사의 옹호발언에 전두환 대통령이 그이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하자고 했을 때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박정수는 김재규 쪽 사람이다, 영어를 잘한다고 건방지다(나의 남편은 건방진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10대 선거에서 김대중 씨 표를 모아서 당선되었다 (오늘날까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자기 세력을 부식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앞잡이’이며 사대주의자(여기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설명했음) 라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박정수는 의원외교에 활용할 필요가 있으니 비례대표나 복수공천을 하도록 연구해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해주면서 한용원 보안사 정보처장을 만나라고 했다.
한 처장으로부터 민정당 창당대회 후에 복수공천을 할 테니 지역구를 조용히 다지고 있으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김천 민정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김용태 경북도책은 “이 지역에 복수공천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유권자들 앞에서 단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모임에서 허문도씨를 만났을 때 내가 “우리 지역구 여론조사 결과 박 의원이 앞선다”고 상기시켰더니 “무지한 중생 말을 믿어요? 4년쯤 왜 못 기다려요?”라고 대꾸했다.
왜 굳이 그이가 4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이상 대화를 잇지 않았다. 그때 ‘김천지구에 대한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졌구나’라고 짐작했다.
허문도씨는 내가 74년 동경 IPU총회에 참석했을 때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학박사학위 공부를 한다고 했다. 총회 기간 중에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일본 여성의원과의 대담까지 성사시켜 신문기사화한 적이 있다. 그런 분이 5공화국 수립 후 어느 장소에서 인사를 하니 별로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의아했던 일이 있었다.
하여간 그분과의 대화내용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려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 분이 일본체류 동안에 재일교포인 정 의원과 각별한 사이여서 이미 언질을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26 사건 후 80년 초에 신당동 자택에 박근혜 양을 위로 방문한 적이 있었고, 81년에 두 번째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부모님을 비운에 보내고 슬픔에 차 있을텐데도, 그리고 아직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의젓해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뿌리가 없는 모함은 곧 사라진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한편 81년 초 한 달 동안 민정당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다. 1월 20일 권정달 사무총장이 남편을 불러서 대통령 지시대로 복수 공천할테니 입당수속을 하라고 했다. 이때 나의 선배 한분이 “발표가 나야 믿지 그전에는 새 정부의 말은 믿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자기도 입법의원으로 내정되었다고 통보를 받았으나 발표 명단에서는 일언반구의 해명도 없이 빠졌다는 것이다.
과연 일주일 후 입당원서를 보류한다는 통보가 왔다. 이유는 우리 운동원이 정 의원 운동원에게 조직책을 내놓으라고 칼부림을 해서 치안국에 조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직접 알아본 결과 우리 운동원과 정 의원 측 사람과의 개인적인 다툼을 확대하여 허위로 날조 보고한 사실이 들어났다.
보안사의 한 처장도 “박 박사 얼굴을 보세요. 그런 일을 지시할 분으로 보이는지”라는 코멘트까지 하며 우리가 시켰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 오직 민정당 당직자만 정 의원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기야 믿었다기보다는 현 조직책의 반발이 너무 커서 복수공천을 무산시킬 구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지지자들은 그이의 성품을 닮아서인지 과격한 사람들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