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42회)

1979년의 국변

“나의 남편은 꽤나 운이 없는 사람이구나”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한해였다. 그렇게 힘들게 6년 임기로 당선되었는데 반년도 안 되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진 것이다.

10.26사건 이전에 나는 미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 스텐포드 대학, 버클리 대학 등 주요 대학 방문차 미국으로 떠났다. 국무성 직원의 안내로 사전에 작성한 스케줄대로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렸다. 임정빈씨 집에서 며칠 유숙하던 어느 날 미국 방송에서 박 대통령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진상을 알 수 없다는 뉴스가 반복되어 나왔다.

친구들과 같이 자동차를 한국 총영사관으로 돌렸다. 이미 총영사관 주변은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총영사관에서는 본국에서 연락을 못 받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박 대통령이 위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 집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밤새도록 통화 신호만 나오고 전화 연결이 안 되어서 혹시 6.25 전쟁 때와 같이 내가 귀국할 수 없는 사태가 전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로 자세히는 말 못하지만 대통령이 시해되었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밤 김재규 부장에 대한 꿈을 꾸었다. 내가 버스를 탔는데 김 부장이 한복을 입고 버스 바닥에 앉는 것이다. 내가 꿈속에서도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후일 그는 그렇게 한복을 입고 포승에 묶여 나왔다.

우리가 아는 김재규 부장은 남을 해치는 성품이 결코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인정이 많고 그러면서도 굉장히 곧은 분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가끔 그분과의 대화를 상기해 보면 무엇인가 생각을 한 것 같긴 했다. 특히 부마사태 전에 그 댁을 방문했을 때 심각한 표정으로 “민심이 천심인데 걱정이에요”라고 해서 우리는 무척 놀랐다. 박대통령의 충복인 현역 정보부장이 얼마나 시국이 걱정되면 그런 말씀까지 했을까?

김 부장같이 사심 없는 분이 나라를 위해 더 일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비운에 생을 마감하게 된 데 대해 남편은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박 대통령과 김 부장 간의 철통같은 신임관계가 악연으로 끝이 나다니,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김 부장이 박 대통령을 향해 총을 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10・26 후의 신군부 등장

강제로 공화당에 입당한 남편은 당의 소멸과 더불어 소속정당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한편 1980년 10월 27일 제 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었고 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을 창립한 후 전두환씨를 초대 총재로 선임했다. 동시에 민한당과 국민당도 야당으로 창립되어 3당 시대가 개막되었다. 남편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 신군부가 등장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 국제정치학회 국제학술대회에 초대된 외국 학자들과 필자

79년 박 대통령의 시해 사건 후부터 81년 3월 27일 11대 국회의원 총선이 치러질 때까지 우리가 겪은 경험은 책이 한 권이 되어도 모자랄 정도다. 신군부 인사들이 청와대에 포진하면서 남편을 친미파일 뿐 아니라 김재규 부장 사람이라는 이유로 정쟁법으로 묶으려고 했다. 새 정부는 남편이 회장으로 있는 구미동창회를 해체시켰고 이사장으로 있는 정치행정연구소에서 발간해온 계간지도 폐간시켰다.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박정수가 그렇게 거물이었을까? 구미동창회가 반정부 단체로 활동한다고 판단했을까? 순수 학술 잡지가 어떻게 신정부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했을까? 우리는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검증은 안 되었지만 들은 이야기는 있었다. 즉, 시기적으로 당시 우리 지역구 공천문제로 출마 예정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청와대 모 참모와의 각별한 관계를 이용하여 남편의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유학파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친미파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편과 역대 미대사관 외교관들과의 언쟁을 목격했다면 그런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외교관들에게 남편은 버거운 상대였다. 그이는 지미파(知美派)이지 균형 감각을 잃은 친미파가 아니었다. 미 의회 의원들과의 교분도 제일 많은 외무위원이었을 것이다.

남편이라고 무조건 옹호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그이는 신기할 정도로 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질을 가졌다. 그래서 4공화국 시기에도 정식 직책은 안주면서 개인자격으로 대미외교에 활용된 것도 사실이다.

10대 총선에서 1등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11대 총선에서 공천은 의례히 그이가 받는 것으로 알고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 하에서 순리대로 한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병이 있는 것을 순진한 우리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서 상세히 기록하기 싫지만 여러모로 ‘돈’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요인으로 작용하는 시기였고 그래서 우리가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고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시어머님은 “돈 주고 욕먹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학자의 길로 나가라”고 하셨다. 불과 1년 전에 1등 당선된 사람에게 근거도 없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2등 한 사람을 지구당 조직책으로 선정하는 상황에서 출마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불출마를 종용한 것이다. 80년 초 설날 부모님께 세배한 후 모든 것을 잠시 잊어버리자고 50년대 초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던 시절에 보던 바다는 그대로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고 이따금 다리 반이 올라가던 영도다리도 그대로였다. 그 다리도 아주 오랜만에 건너보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송도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소나무로 뒤덥혔던 송도는 횟집이 즐비해서 과거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국회배지를 단 남편과 팔짱을 끼고 바닷가 모래사장을 묵묵히 거닐다가 그이가 좋아하는 “얼굴”을 목청 높혀 합창을 하기도 하며 모처럼 행복감에 젖었다. 당장 코앞에 다가올 11대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되든 안 되든, 일단 소망하던 국회의원이 되어보았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해 봄 주무송 대만 외무장관의 초청으로 우리는 대만을 방문했다. 주무송 장관은 주한대사로 있을 때 남편을 무척 좋아해서 늘 “Hi, my brother"라고 불렀고, 남편은 그를 ”big brother"라고 불렀다. 그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거기서 우리는 총통을 비롯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도 만났다. 잠시나마 복잡한 국내정치에서 떠나 머리를 식히고 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귀국해보니 연일 시위의 연속이며 유언비어는 난무하고, 시국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했다. 모든 집회가 금지되던 때여서 몇 사람씩 모이기만 하면 월남의 운명과 보트피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반도에 또 전쟁이 터지면 이번에는 약 먹고 자살하자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이 과도기에 목불인견 현상이 있었다. 박 정권 때는 유정회 의원으로 발탁되기 위해 친정부 글을 썼던 사람들이 10・26 이후부터는 약삭빠르게 박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비겁한 모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