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의 당선 (40회)

투표일

투표당일 새벽, 우리는 황금동 교회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이미 많은 교인들이 와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투표장소로 갔더니 우리 앞에 도포를 쓴 상주가 서 있었다. 비서관이 말하기를 상주(喪主)가 먼저 투표를 하면 재수가 좋다는 미신 때문에 투표구마다 상주가 있는 곳은 한 사람씩 찾아서 앞세웠다고 했다. 효과여부를 떠나 운동원들의 열성에 감복했다.

나는 상주(尙州)로 떠났고 그이는 김천에 남아서 각 투표구를 돌았다. 상주읍, 함창, 몇 개 면단위의 투표구에 다녀보니 우리 참관인은 거의 없었고 있는 곳은 상대방이 술을 마시게 해서 취해있는 장면들을 보며 당선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김천으로 저녁 늦게 돌아오니 남편도 김천 투표구에서 부재자 투표용지를 갖고 한사람이 여러 차례 투표하는 등 각종 부정행위에 자신도 놀랐다며 낙담하는 눈치였다. 한편 공화당은 다음날 당선축하 파티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났다.

투표당일 아침에 시부모님이 타고 갈 자동차 바퀴의 바람을 빼 놓아서 택시를 타고 투표하러 가셨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사무실 앞 운동원들의 자동차 엔진에는 설탕을 부어넣어 망가지게 했다. 이러한 사소한 사보타지는 아마도 백 의장은 몰랐으리라 믿는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선거에서 이기려면 합리적인 참모들과 운동원들을 동원해야지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들이 운동원이 되면 후보자에게 오히려 피해를 주는 사례가 많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투표 당일, 우리 지지자들이 보는 눈앞에서 마구 돈 봉투를 돌리는가 하면 경찰관을 앞세우고 매표행위가 자행되었다고도 한다. 부재자 투표용지를 갖고 한사람이 여러 번 투표하는 사람을 우리 측에서 고발하면 경찰관은 그들을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발한 우리 운동원을 괴롭히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선거 기간 중 우리를 열렬히 공개적으로 지지해준 학교교사의 부인인 예우봉씨는 돈을 돌렸다는 혐의로 경찰서장이 직접 몽둥이로 허리를 내리쳐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대구 구치소로 이송했다. 당시 서장은 공화당을 의식하고 과잉충성을 한 공무원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는 면장, 동장들이 제일 무서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몇 사람 빼고는 모두 우리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 당선과 낙선의 윤곽이 드러나며 백남억 등 중진의 낙선을 예상하는 개표결과 상황을 보도한 기사 (경향신문 1978. 12.13.)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해보면,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기호 5번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며 그 당위성을 한참 설명한 후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돌아서면 뒤에서 “먹은 물에 안 뜨나!” “맨입으로 되나!” “어레, 그냥 가네”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나는 그런 말의 뜻도 모를 때였다. 알고 보니 뭔가 음료수 값이라도 주고 가라는 뜻이라고 했다. 워낙 돈이 없다고 소문이 나서 우리한테서는 많이는 바라지 않았지만 과거 선거를 통해 형성된 타성 때문에 말로만의 선거운동에 익숙하지가 않았던가 보다. 결국 우리도 선거 이틀 전에 운동원들을 통해서 마을마다 ‘박정수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화제가 된 압도적 당선

10대 총선 때만 해도 오늘과 같은 TV중계가 아니어서 우리가 머문 경일여관 바로 뒤의 개표소에서 확성기로 흘러나오는 결과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개표상황을 듣는 일은 피를 말리는 느낌이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에 빠졌다. 새벽에 남편이 나를 깨우며 당선되었으니 일어나라고 했다.

우리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후보 두 사람이 당선되었다. 한사람은 상주 출신이며 재일교포인 정휘동씨가, 또 한사람은 김천 출신인 남편이다. 두 사람 가운데 남편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 그때는 1구 2인 선출인 중선거구제였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서로 얼싸안았다.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꿈만 같았다.

운동원들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남편을 따라가는데 먹은 수면제가 완전히 깨지 않아 술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며 걸었다. 사무실은 메어터질 듯, 운동원들 뿐 아니라 유권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박정수! 박정수! 외치며 그동안 온 힘을 다 해서 고생한 보람을 느낀 모든 운동원들이 열광했다.

어느덧 내 눈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15년 만에 남편이 어려서부터 품어 온 꿈을 실현한 순간이었다. 그것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소속으로 당선된 남편이 너무나도 장해 보였다. 나 역시 이 날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던가!

새벽에 집을 나가 새벽에 귀가하는 강행군을 한 나의 남편! 돈 없이 치른 물질적 고생, 갖은 모략과 음모, 중상을 이겨 내느라고 치러야 한 정신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아내가 고생한다고 안쓰러워했고, 선천적으로 비관적인 성격 때문에 남의 비방을 들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펄펄 뛰는 나를 늘 걱정 말라고, 낙선해도 할 일은 많다고 안심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던 남편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도 힘 드는지 “여보, 이번만 하고 다음에는 출마하지 않을 께. 해보니 우리 같은 사람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미안해”라며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한 남편이었다!

선거결과가 전국적으로 발표된 다음날 한통의 전화가 경일여관으로 왔다. 그것은 존 베씨(John Vassey) 미 8군 사령관의 축하전화였다. “당신 선거구가 전 세계에 한국의 공명선거를 자랑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공명선거가 아니라 부정선거를 거부한 유권자들의 높아진 수준이 우리의 승리를 가져오게 된 주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서울에 올라오면 자기 집에서 축하파티를 해주기 위해 샴페인을 냉장고에 준비해 놓았다며 마치 자기 일 같이 흥분한 음성이었다. 아마도 베씨사령관 주변에서 ”박 박사의 상대가 거물인 만큼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염려를 많이 해서 걱정을 하던 차에 성공했다니 그렇게 기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약속한대로 베씨장군 관저에서 당선파티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