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해에 좋은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물론 미신이라 하겠지만 우리 집 가구마다 보석이 가득 차 있는 꿈은 3월경에, 그리고 몇 달 뒤에는 까만 눈이 세 개나 달린 커다란 붉은 잉어를 누군가가 나의 허리를 향해 던지는 꿈을 꾸었다. 남편에게 전해주면서 꼭 좋은 결실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극복해야 할 장애요인이 태산 같아서 걱정이 마를 새가 없었다.
11월초에 시부모님과 나는 김천으로 내려가서 남편과 합세하여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고맙게도 꼭지엄마가 자기네 2층을 내주어서 부모님은 그곳에서 기거하시고 우리는 경일여관에 간판을 달고 그곳에서 지냈다.
참모진들 간에 내 의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화려하게 입고 오면 오히려 표를 깎는 요인이 될지도 모르니 한복차림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면 위선이라면서 전화로 “당신 평상시에 입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잠바차림이 아니라 정중하게 넥타이를 매고 유권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막상 김천에 내려가 보니 온갖 유언비어가 연일 내 신경을 자극했다. “박 후보는 돈이 없어서 돈 꾸러 다니느라고 바쁘다”, “고등학교 때 백 의장 조카와 연애를 했다” “부인이 아파트 장사를 한다”, “부부가 별거 중이다”라는 등 허무맹랑한 내용들이었다. 선거하면 그런 모함쯤은 다 듣는 이야기라면서 남편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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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총선 무소속 후보 연락사무소 간판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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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루머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반의 최초의 정치학박사 부부라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재래시장에 가나, 운동회에 가나, 어디에 가나 사람들이 우리에게만 몰려오니 여당 후보 측에서 긴장했는지 점점 노골적으로 기관장과 행정조직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여당 후보가 당선될 것에 대비해서 승진을 바라보는 기관장들이나 면장들은 소위 점수 딴다고 필요이상으로 우리 운동원들을 탄압했다. 공화당원들은 마을마다 공개적으로 돼지를 잡고 온갖 향응을 베풀면서 우리 운동원 뒤에는 늘 경찰이 따라붙었다.
한편 공화당에서는 유정회 의원이 어떻게 무소속 후보 운동을 할 수 있느냐며 사표를 받아야 한다는 논쟁이 터졌다. 나는 미련 없이 어두운 시골 여관에서 사표를 써서 백두진 의장에게 보냈다. 그리고 선거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핸드백 없이 돌아다녔다. 후에 들려오는 말로는 공화당의 길전식 사무총장이 “부창부수인데 어떻게 분리할 수가 있느냐. 이 사건을 확대시키면 오히려 박 후보에게 동정표가 갈 수 있다”고 주장해서 일단락되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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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 (1924-2011) [출처 :장흥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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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군의 시골로 들어가면 사람들의 얼굴표정이 굳어있어서 모두 반대파로 알고 안타까워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공화당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무표정으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으면 내 손을 꼭 잡고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유권자들도 많았다. 공무원들도 이번에는 바꾸어야 한다는 분위기로 돌아섰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공무원들이 많았다.
김천의 한 공무원을 통해서 “백 의장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라는 위의 지시가 있었다”는 말로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독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길로 나는 서울로 와서 김성주 치안본부장을 직접 만났다. 그 분은 내 앞에서 대구 도경 정보과장에게 전화를 하고 현지조사를 지시했다. “선거운동에는 참모들이 좋아야 합니다. 법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라고 친절히 충고까지 해주었다. 마음속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김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또 다른 공무원 말에 의하면 김천에서 여당후보의 부정선거양상을 보고해도 대구지부장이 사실을 왜곡한 보도를 상부에 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또 서울로 올라가서 김학고 감찰부장을 만났다. 대통령이 공명선거를 공약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 항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천에서 자행되는 부정선거 사례를 낱낱이 알렸다.
물론 이러한 나의 일련의 노력이 얼마나 먹혀 들어갔는지는 미지수다. 모르기는 해도 거물급인 백 의장에 관한 한 후환이 두려워 그 어느 고위 공무원도 개입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의 당선은 오로지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의 결과라는 사실이 후에 표로 증명되었다.
김학고 감찰부장을 만나고 김천으로 돌아오던 날은 비가 온 후 잔뜩 흐려 있었다. 남편이 지례면에서 유세하는 날인데 내가 도착하니 우리 운동원들이 흥분해 있었다. 그이가 “내가 당선되면 이 지역은 밝은 태양이...” 하는데 그 순간에 갑자기 구름 속에서 태양이 비추어 사람들이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여당 운동원들이 하도 백 의장을 거물, 거물 하니까 우리 운동원들은 그 날 “거물(巨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이 꽝 무너졌다”며 기세를 올렸다. 정작 후보인 남편은 그런 말은 삼가자고 타일렀다.
우리는 재력부족으로 운동원들에게 후한 수고비도 못주었다. 설령 돈이 있어도 무소속이어서 개별 집회가 허용이 안 되기 때문에 남편은 공화당이 푸짐하게 차려놓은 행사장마다 따라다니면서 그곳에 참석한 유권자들과 악수를 하며 자기를 알리는 운동을 계속했다. 물론 주최 측에서는 기가 막혔으리라. 여당 측에서는 “박 대통령이 백 의장을 국회의장 시키기 위해 이번에 공천을 했으니 꼭 당선시켜서 우리 지역에서 국회의장을 배출하자”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는 게임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하루 종일 시골로 돌아다니다가 밤에 혼자 불빛도 희미한 경일여관에서 연필로 대통령께 편지를 썼다. “대통령께서 이번만은 공명선거를 치르겠다고 공표한 것을 믿고 남편이 출마했는데 이 지역에서는 대통령이 백 의장을 국회의장으로 임명하실 계획을 갖고 공천을 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만일 대통령께서 무리한 방법으로라도 백 의장을 원한다면 우리는 미리 후퇴할 용의가 있으니 꼭 알려주시면 고맙겠다”는 요지였다.
박근혜 양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후일 들은 이야기인데 박 대통령이 유정회 당직자들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무소속 탄압이 심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백두진 의장은 나에게 “어떻게 감히 대통령에게 연필로 쓴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느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