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조언 (37...

같은 해 8월 29일 김치열 내무장관을 면회하러 장관실로 갔다. 40분간 남편의 공천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같이 분명하고 객관적이며, 논리적이어서 퍽 좋은 인상을 받았다.

백 의장은 지역구를 소홀히 했다는 여론도 있고 또 얼마든지 더 좋은 직책을 가질 수 있는 분이라고 전제하고 “공명선거를 하려면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공천해야 주무장관인 내가 편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박사와는 많은 교분은 없지만 몇 번 만나보니 남자라도 반할 사람”이더라고 남편을 높이 추켜 세워주니 내심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또 “이 의원이 유정회 3기에 포함이 되면 박 박사에게는 불리하지요”라고 말했다. 김 장관 말에 놀란 나는 절대로 더 이상 국회에 남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나 때문에 남편에게 갈 기회가 박탈된 것 같아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살아왔는데 이번에 또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겠기에 필요이상으로 강경하게 답변을 했던 것 같다.

또 김 장관은 내무부 여론조사로는 재일동포 재력가인 정휘동씨가 1위이고 박 박사는 2위인데 1위로 두 사람을 올릴 예정이라며 정보부에서도 같은 보고서가 올라가면 유리할 것이라고 암시를 해 주었다. 그날 밤 김천에 전화해서 남편에게 김 장관의 말을 알려주었더니 뜻밖에도 김 장관과 정휘동씨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김 장관은 공(公)과 사(私)는 구분할 줄 아는 분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보부장도 내무장관도 대통령의 의중을 바꿀 만큼의 실세들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날로 나는 김재규 부장에게 내무장관과의 만남을 소상히 적고 나는 결코 국회에 남을 의도가 없으며 오로지 남편이 공천 받게 되기만을 희망한다는 간절한 내용의 편지를 들고 김 부장댁 앞에서 기다렸다. 마침 퇴근하는 김 부장이 집으로 들어간 후 비서에게 전달하고 돌아오면서 내 행동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물론 김천에 있는 남편은 이 모든 일을 알 리가 없었다.

▲ 남편의 출마에 대해 진심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 부장에게 전한 편지에 남편이 꼭 공천을 받아야 할 이유를 상세히 썼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그 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재일교포 재력가들인 김윤하 씨나 정휘동 씨와의 싸움이 버거울 것이고, 정부가 아무리 공명선거를 한다 해도 믿을 수 없으며 여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고 적었다. 또 현역의원 측은 우리의 사전선거 사례를 145가지나 포착하고 있다고 겁을 주고 있다고 썼다.

다음날 사모님께서 그 지역은 워낙 “쎈분”이 나오셔서…라고 김 부장이 말씀했다는 것을 전해 주었다. 그 후 이숙종 의원이 김 부장을 만났더니 내가 보낸 편지를 눈물을 머금고 읽었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78년 10월 7일, 김재규 부장이 나를 궁정동으로 불렀다. 남편은 선거운동으로 서울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명선거를 할 테니 마음 놓고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라”는 말 한마디였다. 그 해는 유난히 대통령께서 공명선거를 강조하던 때였다. 무소속에 불리한 선거법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하니 “박 박사가 독약을 마시려고 하면 내가 못 마시게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무소속 출마가 독약이 아니니까 그리 권고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공천은 백남억 의장에게 갈 것 같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기야 그전부터 만날 때마다 무조건 공천은 백 의장에게 간다는 전제하에 준비하라는 말씀이 있긴 했다.

▲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기 전 국제회의에서 남편 / 서 있는 이는 박충훈 부총리이다.

박 대통령과 백 의장과의 관계를 볼 때, 설사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해 여론이 나쁘더라도 마지막 기회를 허락해야 할 사이인 만큼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고 귀띔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또 백 의장은 공화당의 박준규 의원과도 처남매부 관계이므로 박 의장이 대통령께 간곡히 부탁하면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주변 분들의 충고를 많이 들었다. 꼭 공천을 받을 것이라고 장미 빛 약속을 하는 분들도 있었고, 도와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기장을 다시 훑어보니 김 부장만이 현실을 그대로 전하는 쓴 소리를 몇 년 전부터 해 주었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떤 중진의원은 과거의 예를 보면 정보부장이 밀면 공천을 받을 수 있으니 김 부장에게 부탁을 하라는 충언을 해주었지만 김 부장은 그런 일을 무리하게 밀어 붙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지역구에 내려가서 정식으로 무소속출마를 선언했더니 우리 운동원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한국의 선거법은 무소속후보에게 매우 불리하기 때문에 선거운동이 힘들고, 여당이 법해석을 자기들 마음대로 적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시기는 여촌야도(與村野都)현상이 뚜렷하던 시절이었고 농촌에서는 무조건 여당이 “힘이 쎄다”고 믿었다. 과거의 선거에서는 야당이나 무소속 후보를 위해 뛴다는 것이 ‘바위에 달걀 던지기’처럼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1977년 말, 우리를 알리는 수단으로 우리내외 사진이 실린 한 장짜리 달력과 딸에 관한 책을 지역구에 돌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78년 1월말 공화당의 현오봉 정책의장과 길전식 사무총장이 공화당 당사로 나를 불렀다. 달력과 책은 선거법 위반이지만 불문에 부칠 테니 앞으로 조용히 해주면 좋겠다는 경고성이 담긴 말을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백두진 의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 분들의 말이고 선관위의 의견이 나와야 안다. 박 박사는 정일권 의장 사람이라는 딱지 때문에 모든 것이 불리할 거요. 그러나 열심히 싸우시요”라고 말했다. 권오태 의원은 “공화당에서 박 박사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한다는데 조용해서 어떻게 당선이 되느냐”며 자기는 공천 신청을 처음부터 안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었다.

▲ 금릉군 청암사 산속에서 비밀리에 가진 사조직 결성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