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1회)

1949년 어느 가을날 장충동의 경동교회 기독학생 모임에 친구 방덕자를 따라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에 갔다. 당시 우리는 경기여고 4학년이었다 (6년제 시절). 그 날 교회에 가게 된 것은 3학년 때 종교반 주최 부흥회에서 설교를 하신 강원용 목사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강 목사님의 설교는 불교 가정에서 성장한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많은 호기심과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부흥회가 끝나고 종교반 반장이었던 윤남경 언니 주관으로 다과회를 가졌을 때였다. 나는 목사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목사님은 훗날 내 당돌한 질문에 대해 가끔 언급하시곤 했다.

항상 웃는 표정에 낙천적인 인상의 남학생

강 목사님은 기독 학생운동(SCM)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인회’를 조직했다. 바로 그 모임에서 목사님을 먼저 알게 된 방덕자가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키가 크고 얼굴도 희고, 잘 생긴 남학생을 소개받았다. 항상 웃는 표정이어서 낙천적인 인상이었다.

한 친구는 그가 무척 사교적이며 여자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그가 바로 경기고등학교 6학년이었던 박정수였다. 그런데 우리 모임에서 강 목사님은 “정수는 이 다음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에 대한 그런 칭찬은 호남형인 그의 모습과 함께 나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지고 우리는 뿔뿔이 헤어져서 서로의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

6.25와 피난길

1950년 6월 25일. 북한 ‘괴뢰군’이 38선을 뚫고 남침했다는 방송으로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참으로 어수선한 날이었다. 다음 날은 월요일이어서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데 집에서는 전쟁통에 어디를 가느냐고 극구 말렸다. 나는 결석을 하면 안 된다는 고지식한 일념으로 집을 나섰다.

학교 교정에는 몇몇 학생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들께서 부상당한 국군들에게 줄 음식을 정동 주변 가정집에 가서 얻어 오라고 하셨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애국심이 솟아올라 단숨에 교정 밖으로 뛰어나가 아무집이나 문을 두들겼다. 제 각기 들통 같은데 먹을 것을 담아가지고 교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길로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용사들처럼 알 수 없는 흥분과 용기에 온 몸을 맡긴 채 트럭에 올랐다.

의정부 부근이었던 것 같다. 부상당한 군인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러나 분주히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어떤 군인들은 고맙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어떤 부상병은 내게 전화번호 쪽지를 내밀며 가족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왱’ 나면서 호루라기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학생들은 빨리 트럭에 타라”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너도 나도 트럭으로 몰려갔다. 겁에 질려 외치는 외마디 소리, 밟히는 학생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날 밤 어둑어둑할 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와 셋째 언니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곧장 ‘미련한 아이’라고 꾸중을 하셨다. 무척 애를 태우셨던 모양이다. 내가 부상병으로부터 부탁 받은 쪽지를 잃어버린 것을 안 것은 마음이 좀 진정된 후였다. 트럭을 타는 북새통에 그만 놓치고 만 것 같았다. 한동안 그 부상병의 얼굴이 떠오르며 괴로웠다.

한강다리가 폭파되고, 서울이 폭격을 당했다. 북한군의 탱크가 원효로 큰길로 서서히 달려왔다. 몇몇 아저씨들(주로 상가주인들)이 붉은 헝겊을 손에 들고 길거리로 나왔다. 북한군을 환영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붉은 완장을 차고, ‘자아비판’ 저녁 모임에 나오라고 외치며 온 동네를 누볐다.

▲ 경기여고 2학년 시절의 필자

원효로 3가에 있는 언니 집은 다다미 밑으로 방공호가 나 있어서 우리가족도 언니 집에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쾅’하는 폭음과 함께 그릇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놀라 몸을 웅크렸다가 일어나니 앞 건물들이 폭삭 내려앉아 원효로 3가에서 남영동 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아닌가! 입안에 가득 찬 흙을 행주로 닦아 내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방 쪽으로 뛰어갔다. 방공호 속으로 모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밖에서 불이 났다며 “효창공원으로 대피하라”는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다시 거리로 뛰어나갔다. 공원 쪽을 향해 뛰는데, 전신줄에는 사람의 팔 다리가 걸려 있었고, 부상당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 있었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로 거리는 지옥이었다.

마침 밖에서 놀다가 허리에 파편을 맞은 6살 난 조카가 우리를 보고 무조건 같이 공원의 높은 곳으로 뛰어갔다. 그 조카 허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동네 사람들이 입고 있던 흰옷들을 찢어서 머리 위 하늘을 나는 폭격기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 셋째 언니와 나는 결혼한 두 언니 가족과 함께 수십 km나 되는 피난민 행렬에 끼어서 시흥으로 걸어갔다. 큰 형부 친척인 정인보 선생님의 큰 한옥 뒤채에서 다른 셋집을 얻을 때까지 지내야 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밤이었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고사포소리가 계속 울렸다.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셋째 언니와 나는 조금이라도 더 몸을 오그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야 파편을 안 맞을 것 같았다. 어머니 몸이 터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오빠는 서울 아는 집 천정에서 작은 형부와 같이 피신하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산을 두 번이나 넘어 인천으로 걸어갔다. 내게는 무척이나 높아 보였던 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두세 명이 총을 든 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손을 번쩍 들었으나 이제는 살았구나 싶어 반가웠다. 인민군들이 북한으로 후퇴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음 놓고 아무 집으로나 들어가 먹을 것을 청했다. 상에는 찬밥과 함께 고추장인지 된장인지가 차려졌다. 모두 허겁지겁 먹는데 입이 짧은 언니와 나는 몇 숫갈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배고프고 목이 말라서 힘들었던 첫 번째 체험은 8․15 해방 직전이었다. 우리 가족은 2차 대전 후반부터 오빠의 직장을 따라 함경북도 회령에 가서 살았다. 어느 날, 오빠는 러시아군이 쳐들어온다며 우리에게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라고 했다. 오빠는 마무리를 하고 나중에 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의 몸만 빠져나왔기 때문에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의 가족사진들, 나의 어린시절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모두 두고 떠나야 했다.

언니는 여학교 3학년,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기차 안은 8월 마지막 무더위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어느 역, 누군가가 물이 든 바가지를 돌렸다. 도저히 불결해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틀을 굶고 나니 불결함을 생각할 겨를 없이 아무 물이나 마셨다. 난생 처음으로 배고픔이 얼마나 힘든가를 경험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틀 후 8․15 해방이 되었고 오빠는 한 달 후 회령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왔다. 구사일생의 험난한 길이었다. 어머니는 4대 독자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실신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