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나는 9대국회 임기 6년을 무사히 마쳤다. 그 자리에 국민대학 교수였던 남편이 무소속 지역구 의원으로 10대 국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 교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치 부부끼리 자리바꿈을 한 셈이 되었다.
정치이론만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내가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이 되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며 개인적으로 유익한 6년을 보냈다. 유정회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죄인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유정회는 지역이익을 우선시하는 지역구 의원의 한계를 견제하고 보완해주는 직능대표들로 구성된 비정치인들의 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정회는 탈 지역, 탈 정당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국정에 임할 수가 있었다.
소수의 과잉충성파를 제외하고는 유정회 의원 대부분이 자기 분야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전문인들이었다. 소위 요즘 말하는 ‘코드’를 초월한 인선을 한 박대통령이 대단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학계와 여성계를 대변할 직능대표라는 자긍심을 갖고 외무위와 문공위에서 일하면서 나의 주장이 반영될 때는 보람을 느꼈다.
유정회 1기 3년간은 2기보다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한 경직성을 보이기도 했으나 해가 거듭되면서 개개인의 전문성을 발휘했다고 본다. 지역구 의원이건 유정회 의원이건 때로는 당시 유행어로 ‘점수따기’를 목적으로 불필요하게 강경노선을 고집하는 의원들 때문에 쉽게 풀릴 정치문제가 오히려 복잡하게 꼬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정생활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 우선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더 크다는 점과 시간제한이 없는 회의에서의 의원들의 불필요하게 긴 발언습성, 당장 그때만을 모면하려는 국무위원들의 알맹이 없는 답변, 그리고 소위 의원들 간의 몸싸움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제일 혐오한 것이 본회의장 아닌 곳에서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덧붙여 한 가지 더 곤혹스러웠던 일은 100만원씩이나 봉급을 받아 어디에 다 쓰느냐고 친구들이 놀릴 때였다. 지금은 사무실, 비서, 기사 봉급 등이 별도로 책정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그 모든 것을 세비에서 지출했다. 9대국회와 17대 국회는 여러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유정회 의원 경험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학자로서 나에게는 6년간의 체험이 귀중한 산교육이었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짐작을 초월하는 현실을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으로 돌아간 후 나의 강의내용이 더욱 충실해졌다고 자부한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국가체제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그 체제에 동참해서 자기 나름의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길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당속의 야당 구실을 할 수도 있고, 옳지 않은 제도나 운영상의 문제점을 계속 지적하고 환기시킴으로써 거창한 개혁은 아니라도 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도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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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대 국회의원 시절 / 일본 의원이 내 얼굴을 스케치해 준 것을 구태회 의원이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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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속옷이 젖는다”는 말도 있다. 과격한 개혁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이 내 신념이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으로 한국도 서서히 변화하여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국가로 우뚝 서게 되지 않았는가. 나는 국회 경험 6년 동안 주로 외교, 교육, 문화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그래서 정치를 했다는 말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권은 시행착오도 많았으나 안보와 경제 분야 만큼은 확실히, 철저히, 효율적으로 챙겼다고 생각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미군 철수정책, 한반도의 적화는 미국과 일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프레이저 의원의 충격적인 발언, 카터 대통령의 미군철수 정책 등이 발표될 때마다 정부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내 남편과 같은 지미파(知美派)들도 동원해서 미 의회를 설득하고 미국 매스컴에 기고도 하게 하는 등 미군철수 반대운동을 폈다. 그것들은 민족정신이 결여된 친미의 발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쟁을 방지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특히 1975년 봄은 월맹의 무력 적화통일이 이루어져 한국으로서는 북한의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월남에서는 월맹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미군철수가 이루어지고 얼마 후 월맹이 남침을 감행하여 적화통일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제2의 베트남전쟁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미군철수를 반대하면서 한미동맹관계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미군주둔을 통해 철통같은 안보환경이 구축되었기에 한강의 기적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철강산업, 조선산업, 고속도로 건설 등이 그 시대에 이룩해놓은 경제적 업적이다.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생활의 향상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켜온 나라인데 오늘날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일부에서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두렵기 만하다. 유럽과 같이 집단방위 기구나 다자간 안보체제가 없는 동북아에서 미군이 빠진 후 국가적 안위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민족끼리”라는 감성적인 구호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다.
한 정권에 대한 개인의 감정에 따라 그 정권의 업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권도 경제정책에 실패하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독재정권이라고 비판받는 박정희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민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박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