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법 개정에 얽힌 이야기
9대 국회가 구성되자마자 유정회 여성의원 9명과 신민당 여성의원(지역구) 2명과의 인터뷰 내용을 조선일보에서 사진과 함께 한 페이지 전면에 게재했다. 그때 나는 임기동안에 여성에게 불리한 민법 개정에 앞장서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후 늘 그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일도 아니므로 연장자이며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겸직한 이숙종 의원과 의논을 했다.
“9대 국회 임기 중 민법 개정을 관철시키는 일에 저희 에너지를 집중시켜보면 어떨까요. 기자들의 인터뷰에서 공약을 했는데 이숙종 의원님께서 여성단체협의회의 힘을 빌려 주도적인 역할을 해보실 의향이 있으신지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나 5년 후에 일부를 개정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시발점이라 하겠다.
그 후 50년대부터 민법 개정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이태영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1973년 범여성가족법 개정촉진회를 원외에서 구성하게 되었다. 이 분야에 관한 한 이태영 박사가 당연히 회장 직을 맡는 것이 순리였겠지만 여성단체장들은 원내와 원외활동의 유기적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인지 이숙종 의원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때 이태영 박사가 내색은 안했지만 서운했으리라 짐작된다. 그 이후 두 분의 문제해결 접근방법에 의견차이가 있어서 여러 번 부딪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태영 박사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반면에, 이 의원은 온건하며 무리하지 않고 점진적인 단계를 밟자는 주장이었다. 이 박사가 전화로 2시간 반 동안 이숙종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도 있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 조금이라도 오해를 풀 수 있는 방향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가족법 개정에 관한 아이디어를 이숙종 의원께 제공한 것을 나는 지금도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생각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 일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숙종 의원 뒤에서 자문해드리고 같이 뛰어 다니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당이 그들의 정치생명에 연연해서 유림의 극렬한 반대를 의식하고 1977년까지 가족법 개정에 대한 이렇다 할 대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숙종 의원과 나는 다른 여성의원들과의 전체회동 외에, 숨은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숙종 의원은 원외 촉진회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원내에서 이원적으로 접근했다.
가족법 통과를 위한 원내외 활동
촉진회가 원외에서 발족된 후 학계의 김주수(경희대), 김용한(건국대), 박병효(서울대) 교수 등이 가족법 개정의 당위성에 대한 강연회를 수없이 개최했다. 여성단체들은 지역구 의원들에게 편지 쓰기, 만화 홍보자료 제작 등 다각적인 운동을 통한 여론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유정회 여성의원들은 1974년 7월 2일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났다. 그 자리가 가족법 개정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첫 기회가 되었다. 저녁 식사 때는 박대통령도 합석을 했다. 8.15에 피격당할 운명에 놓인 영부인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셈이다.
그 후 7월 22일 구태회 유정회 정책의장실에서 여성의원들이 모였을 때 구 의장이 기록을 위해 일단 원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는 안을 냈다. 그러나 일부 여성의원은 통과될 수 있는 핵심적인 조항만을 간추려서 제출하자고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유정회 정책연구실의 지원을 받기로 정식결정이 내려졌다. 그 후 경향식당에서 또 한 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이 자리에서도 여성의원 사이에 의견이 모아지지 못했다.
9월 14일은 정책연구실의 전문위원이 유정회 사무실로 와서 문제의 법조문 해석을 해 주는 날이었다. 이숙종, 허무인, 구임회, 박정자, 이범준 다섯 명만이 참석했다. 이날 대충 10가지 조항으로 골격을 만들었다. 그 후 원외의 촉진회에 대한 보조금 지원문제를 토의하는 모임, 그분들을 위한 식사대접 등 수없이 모여서 각기 다른 의견 수렴에 노력을 했다. 그리하여 1974년 9월 30일 촉진회의 개정안을 국회에 전달했다.
그러나 여성의원들 간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 통과가능성이 없는 개정안보다는 수정안이 좋겠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 때 김주수 교수에게 수정안 작성을 의뢰한 것이 원외에서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1975년 4월 19일 모든 여성의원 등 20명이 서명한 촉진회 개정안을 원안대로 국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1975년 내내 법사위원회에서 가족법 개정안을 상정시킬 기색이 안보여서 초조한 이숙종 의원과 나는 법사위 의원들을 개인별로 한분씩 만나면서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1975년 11 월 3일 법사위원회의 중진중의 한분인 한태연 의원을 서린호텔로 초청해서 세 사람이 오찬을 같이하며 우리의 개정안을 빨리 상정시켜달라고 부탁했다. 한의원은 “제안 설명은 가능할지 모르나 결의까지는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이 맞아 떨어졌다.
11월 14일 드디어 제안 설명의 기회가 왔다. 그 전날 이숙종 의원이 전화로 모 여성의원이 보충설명의 기회를 신청했다며 국회의장, 정책의장, 총무는 법사위원회 위원장에게 맡기기로 결론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일 아침에는 장영순 법사위 위원장이 보충설명을 하겠다는 의원이 있는데 왜 여성의원들이 분열되었느냐, 보충설명은 제안 설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나에게 푸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장 위원장의 능숙한 의사진행 솜씨덕분에 이숙종 의원의 역사적인 개정안 제안 설명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제안 설명이 있은 지 1년 후인 1976년 12월 8일에서야 법사위는 민법개정안 심의 7인 소위를 소집해서 개정안 심의에 착수했다. 전문위원 예비검토보고, 제안자 측의 보충설명과 참고인으로서 경희대 김주수 교수의 찬성의견만 들었다. 회의장에는 촉진회 산하 60여개 단체회원 150여명과 개정 반대 측의 유림회 간부 3명이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고 신민당 정일형 의원도 의원석에 나와 부인 이태영 박사를 지원했다.
이날 김명윤 의원(신민당)은 “남녀평등문제를 법률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전승된 인습을 무시하는 처사로 남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구조적인 차이가 있으며 특히 가족의 구심점이 호주인데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여자가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낼 수 있느냐”면서 법개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박찬종 의원(공화)은 “국민소득이 500달라가 된다고 해서 문화마저 선진국을 모방하려는 처사는 용납할 수 없다. 민법의 골격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