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IPU총회 대표 (29회)

나는 1975년 9월 초에 개최된 런던 IPU 총회에도 대표단에 포함되었다. 동경 총회 때 여성의원으로는 문공위원인 이숙종 의원과 같이 갔고 런던 총회에는 건설위원인 서영희 의원이 동행했다. 어느 나라든 개막식이 성대한 이벤트로 치러진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환영 연설을 했고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런던에서의 IPU총회 개막식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시원한 하늘색 의상에 하늘색의 모자를 쓴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오렌지색 투피스 차림에 넓은 챙의 까만 벨벳 모자를 쓴 대처 보수당 당수가 나란히 단상에 앉아있던 장면은 여성파워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모든 의식이 고전적인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대법원장이 사진에서만 보아온 전통적인 가발을 쓰고 참석한 것도 특이해 보였다.

일본에서의 천황 연설, 리셉션 때 둘러본 어마어마하게 넓고 아름답게 꾸며진 황궁, 그리고 영국에서 본 여왕과 왕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저택들을 보면서 내심 놀랐다. 특히 민주주의의 본산지인 영국에서 오늘날까지 군주제가 말썽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그 자체에 의문이 들었다. 그 많은 국민의 세금이 왕족들의 호의호식과 엄청난 궁전 유지에 사용되고 있는 데 대해 국민의 저항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늘 불가사이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물론 영국정치 교과서에는 군주의 기능을 1) 국가의 아버지(왕) 혹은 어머니(여왕)로서의 심리적 요인 2) 국가의 안정성과 계속성의 제공 3) 영연방을 이어주는 통일의 상징 등 무척 편리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유일한 여성 외무위원이여서인지 한미 의원협회, 한일 의원협회, 아태 의원회의 등 국제회의 때마다 단골 연설자로 지명되었다. 동경 IPU에서 처럼 런던 IPU에서도 북한대표의 연설 후에 나의 순서가 왔다. 당시 홍기문 북한대표의 연설문 내용이 의외로 온건해서 나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설을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역할이 없는 어느 날 한국일보 김성우 주 프랑스 특파원의 알선으로 프랑스 여성부장관인 지루(Fransoise Girou) 여사를 만나기 위해 박준규 대표단장의 허락을 받고 파리로 떠났다.

▲ 런던 IPU총회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 (1975. 9. 6.)

세계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에만 여성부가 신설된 이유를 물으니 여권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생소했던 프랑스의 여성부 기능 등에 대해 40분간 대담을 나누고 그 날로 런던 회의로 다시 돌아갔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여성이 집권하면 세계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 미국 루주벨트 대통령 부인의 말을 인용하자 그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인도의 간디, 이스라엘의 메이어의 집권 때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 남성은 더 창조적이며 비전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놀란 나는 그럼 남성 우월주의를 믿느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고 남녀의 역할이 다르고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여성부여서 많은 흥미를 끌었기 때문에 지루 장관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은 점잖고 침착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했다. 그녀는 무조건적인 여권주의자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여성부가 왜 지루 여사를 위해 신설된 위인설관이라는 소문이 났는지 짐작이 갈듯 했다. 얼마 후 이유는 모르지만 프랑스의 여성부가 폐지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귀국 후 2주일이 되던 9월 26일 백두진 의장의 전화연락을 받고 사무실로 나갔다. 내가 런던 IPU 총회 폐회 하루 전에 무단귀국을 했고, 회의 도중에 개인일로 회의장을 떠났다는 보고를 청와대에서 접수하고 백 의장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모함할 자료가 없으니 거짓보고까지 하다니. 누가 누구를 시켜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보고서에는 나만이 아니라 박준규 단장에 대해서도 나쁜 내용이 포함되어 그 부분은 공화당 이효상 의장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회의도중 파리에 가서 여성부 장관과 면담한 것은 나의 역할이 없는 날이었고 단장의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또한 폐막 전날까지 모든 회의가 종결되고 12일은 국가별로 2명의 의원이 이사 자격으로 남아서 이사회에 참석하는 날이어서 나머지 의원들은 전날에 귀국하는 것이 상례였다. 두 명만이 남고 전원이 떠났는데 왜 나만 문제가 된다고 보고를 했는지 그야말로 황당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회의에 동행한 김세련 외무위원장이 백 의장 사무실에 와서 확인을 해주어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런데 12월 22일 백 의장이 갑자기 청와대에 보낸 의장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경고를 했습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12일 이사회 폐막식에 토의사항이 없어서 단장의 허락을 받고 귀국.... 임무를 완전무결하게 완수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 마치 나에게 잘못이 있는 듯한 내용이 거기에 쓰여져 있었다. 화가 많이 났지만 유정회 2기에 재선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그 시기는 3년 임기를 마치고 유정회 2기 후보명단을 작성할 무렵이었다. 모두 재선을 위한 운동을 치열하게 하거나 정적을 제거하려는 중상모략이 한참이었다고 들었다. 그것도 나는 나중에야 남의 귀띔으로 겨우 알게 되었으니 어수룩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무위에서 문공위로 교체되면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중남미 5개국을 순방한 다음 해 77년에도 국회 문공위원 자격으로 구미국가 6개국(그리스, 영국, 스웨덴, 벨지움, 프랑스, 미국) 순방을 하게 되었다. 연초에 이미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개최된 세계반공연맹 총회와 대만의 세계자유의날 행사에 연사로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다.

▲ 팁 오닐 미국 하원의장과의 대화

정치가 그렇게 치사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현지 공관의 정보부 파견원들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또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그런 허위보고를 올렸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런 모함이 먹혀 들어가는 시대였나 보다. 후일 어느 여성의원이 나에게 전화로 자기는 누가 그런 중상모략을 했는지 안다고 해서 알고 싶지 않다고 듣기를 거부한 일이 있다.

이런 웃지 못 할 코미디를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하루속히 떠나 학계로 복귀하고 싶었다. 나는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남편이 발탁되기를 바랐고, 김재규 장관뿐 아니라 주위의 여러분이 남편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뜻과는 달리 또 각종 모함에도 불구하고 내 국회 임기가 3년이 연장되었다. 신문과 방송마다 유정회 2기 명단 발표가 나오고 우리 집으로 축하전화가 빗발쳤다.

내가 전화코드를 빼놓는 것을 본 중학생 아들이 나에게 슬그머니 와서 “엄마 축하해요. 그렇지만 공개적으로 기뻐할 수도 없으니 마음이 안 됐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빠에게 가서 “유정회 의원은 가짜 국회의원이고 아빠는 다음에 진짜 국회의원인 지역구 의원이 되세요”라고 위로하는 것이다. 어리게만 본 아들아이가 아빠와 엄마의 심정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