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의장은 일본 중의원 의사당이었다. 북한대표 김영남이 등단하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을 비민주주적 독재국가이며 인권이 말살되어 있는 나라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를 비판했다. 심지어 정보부는 이화여대 학생들을 발가벗겨서 독사뱀으로 고문을 한다는 등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연설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내 연설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끼리 마치 이민족처럼 서로 비난하게 된 것을 침통하게 생각한다”고 전제를 하고나서 “누가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지 따져보자”는 말로 시작했다. 이어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납북된 KAL 승무원과 스튜어디스의 강제결혼, 인민재판을 통한 인권침해, 정치수용소의 실상 등을 일일이 지적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겁도 없이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이때 의장석에 앉은 수단의 에로프 콜 의원이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의사봉을 두들겼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내가 전 이화여대 교수였는데 독사뱀에 의한 고문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하고 북한 대표단 쪽을 가리키며 “당신들은 가슴에 달고 있는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을 자유가 있느냐. 그렇다면 당장 떼어보아라”고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끝으로 국제적십자사와 IPU 집행위원회의 조사단 파견을 제의하자 연설도중에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영남 북한대표가 한국을 욕설로 비난했을 때는 일본의 후꾸나가 의장이 방관했는데, 오히려 온건한 한국 측 연설에 수단의장이 주의를 환기시킨 데 대한 우리 측의 항의를 집행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핀란드를 비롯해서 몇몇 국가대표들은 오히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바람에 더 경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자 벨기에, 인도 대표 등 7명이 찾아와 악수를 청하며 격려한 사실이다. 사람을 시켜서 쪽지가 전달되기도 해 살펴보니 공산권의 폴란드와 동독대표가 쓴 메모가 있어서 내 눈을 의심했다. 거기에는“Congratulations on your excellent speech" 라고 쓰여 있었다. 역시 억지 비방은 국제회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같은 공산 진영국가이지만 북한이 너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20여명의 우리 측 대표들은 내가 사회자의 저지를 받을 때 여자니까 마음이 약해서 연설도 마치지 않고 하단할 것 같아서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우리 대표들은 몸집도 작은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느냐며 칭찬을 많이 해주었고 국내언론도 크게 보도를 했다. 그 연설 후 NHK 등 일본 매스컴의 인터뷰 신청이 많이 들어왔다.
리셉션에서 우리대표단은 북한 대표들을 만났다. 야당인 송원영 의원과 북한의 윤기복 대표 간에 “당신네 야당도 반대할 자유가 있느냐”, “반대를 왜 하나. 반대할 이유가 있어야지. 100% 지지뿐이지. 기적이다” 등의 대화가 흥미 있게 이어지는 것을 들었다. 장기영 의원은 사석에서 “북한이 자유니 민주니 하며 한국을 비방하려 든다면 일본 귀신들도 웃을 것”이라고 해서 모두 웃기도 했다.
이숙종 의원과 같이 서있는데 북측 대표들이 다가와서 “딸을 잃으셨더군요”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이라는 책도 출판하셨고요” “한복을 입으면 더 예쁜데 왜 양장을 하셨죠?”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입은 험하더군요” 등등의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해 매우 상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섬뜩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북한으로 가시지요”라는 여유 있는 농담도 했다. 그 전 해에 그들을 만난 남성의원들이 북한 대표들이 그전보다 많이 유연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조총련계 교포들이 북한대표의 일본 체제비를 모두 담당한다는 말도 들었다. 하여간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북한동포들과 접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 적대관계가 되어 국제회의에서 서로를 헐뜯는 현실에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그 당시 조선일보의 허문도 주일특파원이 일본의 탤런트 출신인 산또 아끼꼬[山東 昭子] 여성의원을 나의 숙소로 안내해서 둘이 대담을 한 기사를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대단한 미모일 뿐 아니라 대담을 해보니 무척 야무지고 자신만의 확고한 소신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 매스컴은 전체 여론과 다르다”, “배우 때처럼 말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된다.
일본 측은 대표단들을 천황의 궁전에 초대해서 처음으로 황궁구경을 할 수 있었다. 대형 방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며 그림같이 가꾸어놓은 정원이 눈에 띄었다. 그 곳을 나오면서 세금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궁전과 왕실 가족들에게 사용하는 데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는 일본국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