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편을 그리며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발한다’는 영국 속담이 점점 더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행복은 떠나가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의 뜻을 나는 몰랐다. 그 이를 잃은 후에야 뒤늦게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니 말이다. 반세기 이상 생을 같이 해온 짝을 잃으면서 인생에 대한 애착과 미련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빛을 잃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살면서 불평도 많았고 부질없는 욕심으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좌절 했었다. 그러나 그 무엇인들 생명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시련이라고 고통스러워했던 옛일들이 모두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10대 소년 소녀로 만나 6․25 전쟁 중 피난처 부산에서 장래를 약속하고, 미국 유학을 하던 중, 20대에 결혼하여 30대 초에 귀국했다. 그 후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때로는 친구로, 연인으로, 동지로, 파트너로 갖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애시절부터 따지면 52년간 동고동락했다.
한국사회의 ‘엘리트 부부’로 불리우며 학계에서, 정계에서 같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분야를 전공한 덕분이었다. 부부 정치학 박사 1호(같은 대학, 같은 분야, 같은 학위 취득)라는 꼬리표에 걸맞게 부부교수, 부부 학장, 부부 국회위원, 남편은 외무위원장, 외무장관, 아내는 국제정치학회장, 외무부 외교정책 자문위원장으로 그야말로 일심동체가 되어 한 길을 걸어왔다. 이 모든 특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어령 박사는 남편의 추모비에 ‘박 박사는 경북, 김천이 낳은 세계적인 정치가, 외교관, 정치학자의 세 가지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간 사람’이라고 썼다. 하지만 자기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인생을 마친 남편을 생각하면 아내인 나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지역구에서 남편의 별명은 ‘영국신사’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온화한 성품, 점잖은 행동, 선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할 줄 모르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지만, 바로 그런 성품 때문에 지금도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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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시 대통령 취임식 연회장에서 남편(박정수 전 외무장관)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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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3년여 병상에 있는 동안 찾아주시고 걱정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이 지상을 통해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어릴 적 남편의 소망을 이루게 했으며, 5선의원으로 만들어주신 김천시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현수막까지 걸고 축하해 주었던 일도 새삼 눈물겹게 고맙다. 그이가 국회에서, 국제무대에서 나라를 위해 외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변함없는 김천시민의 사랑과 지지의 힘이었다.
이제 70고개를 넘었으니 내 인생도 기울어가는 해와 같이 서쪽의 끝에 와 있다. 사랑하는 남편이 떠난 후 모든 것이 허무해진 나에게 어릴 적 친구 강인숙 교수가 글을 쓰라고 적극 권했다. 우선 글 솜씨가 없어서도 망설였지만 남편이 생전에 회고록을 원치 않았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진실을 쓴다 해도 회고록이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만 같아 용기를 냈다. 또한 남편이 살아온 역정이 한국 정치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밝히고 싶은 대목들도 있어, 그의 유지를 어기고 이 글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그와 지낸 52년의 세월을 회상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이 책을 내도록 나를 격려해 준 친구 강인숙 교수의 우정에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최후까지 이 원고에 대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완성품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준 성신여대 박정혜 교수의 노고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작년에 탈고하기까지 의논의 상대가 되어준 제자 백영옥(명지대 교수), 아들 박성우(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와 컴퓨터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 며느리(이주영 덕성여대 전산학과 교수)의 도움도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선뜻 출판을 맡아주신 출판사에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2006년 5월
李 範 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