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누워있던 성연이는 텔레비전을 통해 엄마 이름이 나오자 “아빠가 먼저 국회의원이 되었어야 하는데..”라고 할머니에게 아쉽다는 듯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6년간의 의정활동을 통해서 현실과 이론 간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다는 정치적 현실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일은 후에 성신여대 정외과에서 강의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6년간은 개인적으로 결코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다. 남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오히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지내야 했다. 우리가 젊어서 꿈꾸고 계획했던 것은 남편은 정치, 나는 후배양성을 하는 것이었는데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떤 불만을 표출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김종필 총리를 비롯해서 몇 분들에게 남편의 거취문제를 거론하면 의례히 대사로 나가라는 제의가 왔다. 그러나 본인은 대사직에 관심이 없고 오직 김천에서 출마하겠다는 목표 하나뿐이었다.
우리 집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가정이었다. 친정 부모님 같은 시부모님, 열심히 일하는 남편, 착한 남매, 내가 원하던 교수직, 나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언젠부터인지 성연이가 천식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다. 나는 대학 강의시간 사이에 성연이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다녀보았으나 의사들은 성장하면서 서서히 증세가 호전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다루었다.
1971년 여름 미국에서 개최된 어느 세미나 참석차 부부가 같이 나가는 길에 남매를 데리고 갔다. 성연이를 미국의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의사들이 대부분 여름휴가로 자리에 없었고 사전예약이 안되었기 때문에 진찰받을 기회를 놓치고 그냥 귀국해야 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부터 성연이는 서서히 먹지 않으려하고 체중이 감소되어갔다. 결국 서울대 병원에서 몇 달간 정밀검사결과 뇌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 후 2년간의 처절한 투병 끝에 만 10살이 되는 생일을 열흘 앞둔 1973년 여름에 성연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우리가 미국에서 고학을 하며 힘겹게 길러온 딸아이, 남의 손에서 자라야 했던 가엾은 우리 아기,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피아노도 잘 치고, 무용도 잘 하고, 교회에도 잘 나가던 성연이를 잃고 우리는 한동안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나는 1974년 성연이의 투병기를 한권의 책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으로 엮어냈다. 그 책을 쓰면서 나는 남아있던 눈물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쏟아냈다. 성연이를 내 가슴에 묻고 살아 온지도 벌써 30년이 넘는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내 가슴속의 성연이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의 책표지 그림은 내가 60년대에 반도호텔(지금의 롯데자리) 화랑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이었다. 엄마가 어린 딸을 안고 있는 평화롭고 상징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의 화가인 이숙희 씨가 자기 승낙도 없이 표지로 썼다고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내용이 어느 날 하루 종일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어서 몹시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정보부의 김영광 국장이 전화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자식을 길러본 어머니라면 이해를 할 것으로 믿고 이숙희 씨를 직접 찾아갔다. 설명을 했더니 다행히도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해서 일단락되었다. 일단 돈 주고 구입한 그림인데 왜 사용이 금지되는지 아직도 잘 납득이 안 간다. 성연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그 책에 담아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쓰지 않겠다.
중학교 1학년인 성우가 외로워해서 둘째 언니의 아들인 박인원(현재 중앙대학병원 내과 과장)이를 데려왔다. 그 언니는 아들이 여섯이어서 넷째인 인원이를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허락한 것이다. 성우가 인원이 형을 잘 따르고 공부도 배우면서 가끔 우리 네 식구가 외식도 하곤 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그 집은 딸이 죽으니까 그동안 밖에서 낳아 길러온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는 것이다.
우리 넷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아니 땐 굴뚝에서 또 연기가 났다”며 웃었다. 나는 헛소문을 수없이 듣고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친정조카인 인원이의 얼굴이 훤하게 잘 생겼고, 인상이 그이와 비슷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딸이 죽기 전에도 해괴망측한 소문에 시달린 적이 있다. 우리 집에 그이가 밖에서 낳은 간난 아기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문은 지금도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이대의 모 여교수집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로 착각하고 퍼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귀띔해준 적이 있긴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