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은 우리 가정에 세가지 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 한 해였다. 남편은 정부를 떠나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자리를 옯겼고 나는 교수직을 떠나 9대 국회 유정회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만 10살 되는 딸을 뇌암으로 잃는 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남편은 무임소 장관 보좌관 (차관급)으로 있다가 장관이 바뀌면서 행정부직에서 물러났다. 그이는 1972년 말 국회의원 총선 때 공화당 공천신청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무소속 출마 예정으로 고향인 김천에 내려가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서울에 남아있는 나에게 이동원 전 외무장관이 전갈을 보내왔다.
당시 김천 출신 국회의원인 백남억 의원이 이번에는 고령이고 다른 고위직으로 물러나게 되어 “공천신청을 안 한다니까 박 박사에게 신청을 하라”고 나의 선배인 부인을 통해서 급히 전해 왔던 것이다. 그분들과는 두터운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김천에 있는 남편에게 곧이곧대로 전달을 했고 그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공천신청을 했다.
그런데 공화당에서 공천신청을 한 후 탈락되면 출마를 할 수 없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현역인 백 의장이 공천신청을 안하면 남편 외에 유력한 후보가 없는 상황이어서 마음 놓고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남편의 경우 어려서부터 포부가 입법부였기 때문에 1965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부터 줄기차게 고향사람들과의 접촉을 해왔고 총리실에 있으면서 김천 상주지역을 여러모로 챙겨온 터였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에게 전달된 정보와는 달리 백 의장이 공천을 받았고 순진한 남편은 서명한 서약서를 지키기 위해 출마를 포기했다. 후에 알아보니 남들은 서약서에 서명하고도 공천에서 탈락되자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후일 이 장관은 자기도 그쪽의 그런 말을 믿고 우리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미안해 했다. 모두가 그이의 운명이었겠지만 늘 우리는 그때의 해프닝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한편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순진했는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그때 얼마든지 무소속으로 출마를 할 수도 있었는데 다른 정치인들이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서약서를 지키기 위해 결국 그는 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그 후 본인이 직접 설립한 한국정치행정연구원(재단법인) 이사장 겸 원장으로 학술논문집을 계간으로 출판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 국민대학교의 초청을 받고 행정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학생처장, 교무처장을 역임하면서 국민대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다. 우선 학생들이 국민대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도록 했고 외국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교수로 스카우트했으며 장안의 유명한 교수들을 시간강사로 모셔서 학생들에게 훌륭한 강의를 수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가운데 한분이 이어령 이화여대 교수였다.
이어령 교수의 초청으로 방한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신부도 국민대학에 초빙하여 특강을 하게 했고, 장학금제도도 확장시키는 등 학교를 위하여 동분서주했다. ‘쌍용’ 회장에게 자기들이 설립한 학교인 국민대 출신을 채용하지 않으면 어느 기업이 채용하겠느냐고 회장을 설득하여 우수한 국민대 졸업생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열어주기 했다. 무슨 일이든 몰두하게 되면 최선을 다하는 그의 성격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그동안의 한국생활과는 거리가 먼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조용한 교수생활이 시작되는 줄 알았으나 그는 전보다 오히려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학교 행정에 깊이 관여했고 정부시책 평가교수로, 구미동창회 회장으로, 한국정치행정 연구원장으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늘 학생, 교수들과의 모임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국민대학에서 알게 된 잊지 못할 학생이 한사람 있는데 그 학생이 바로 열린 우리당의 장영철 의원이다. 데모에 가담하여 수감생활 끝에 복학을 했는데 졸업할 때 학점문제가 있었나 보다. 남편은 학생처장으로서 그가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수배를 받아 숨어 다닐 때도 여러 번 백홍배라는 제자를 통해서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장 의원은 그이를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우리 부부는 결국 두 사람 다 교수가 되었다고 기뻐하면서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남편의 포부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해 나는 늘 안쓰러워했다. 물론 본인은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이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명랑하고 밝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살아가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오히려 남편의 진면목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현실에 내가 더 초조했다.
1973년 새 학기가 시작되어 국민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남편과 나는 각각 강의준비에 바빴다. 그뿐 아니라 그때 이미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는 딸의 병 수발로 병원을 들락거리며 정신없이 지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의아해 하며 갔더니 홍성철 정무수석이 맞이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유정회 의원으로 임명했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당황한 내 머리 속에서 ‘그토록 남편이 원하는 국회의원직을 내가 먼저 맡다니 이것은 안 될 말이다. 더구나 공화당의 계략에 의해 무소속 출마의 기회를 놓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당장 스쳐갔다. 그 자리에서 홍 수석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나보다 남편이 더 자격이 있는데요.”
“유정회의원은 직능대표로 구성되는데 이 교수는 여성계와 학계를 동시에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이 되었어요. 박 박사는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말고 저의 선배인 김옥렬 박사(숙대 교수)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박대통령께서 종이쪽지 위에 이범준이라는 이름을 여러 번 써가면서 꼭 승낙을 받으라고 하셔서...”
난처해진 나는 또 혹시 내가 거절함으로써 남편에게 불이익이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그러면 만일 제가 홍 수석님의 친동생이라면 어떤 결정을 권하겠습니까?”
“나라면 승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남편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요.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박 박사를 챙기지요.”
집에 와서 남편과 의논을 했다. 우리는 홍 수석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분은 남편의 경기 선배이며 미국유학시절 주미 공사로 계실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우리 부부의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파티까지 베풀어주신 분일뿐 아니라 귀국 후 정일권 총리께서 비서실장을 물색할 때 특별보좌관이었던 남편이 그 분을 적극 추천하고 중간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이는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냐”며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현실정치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는 언젠가 고향인 김천에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내가 태어나서 성장한 원효로에서 출마할 의사가 있느냐고 당시 공화당 간부인 김옥자 씨가 타진해온 적이 있었다. 물론 일언지하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