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리의 추천
2년 반 근무하고 나니 정 총리가 언젠가는 꼭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도록 할 테니 그동안 차관급인 무임소장관 보좌관으로 일해보라고 했다. 신문에는 승진발령으로 발표되었다. 정 총리 말씀이 “자네는 너무 젊어 보이는 것이 흠이네. 모두들 장관하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해서…”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의 경기 동기인 이재설 씨는 이미 재무장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 동안 여러 번 차관으로 정 총리가 추천을 했으나 매번 성사가 안 되었다. 당시만 해도 장관들이 박사학위 소지자를 차관으로 기용하기를 꺼려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뿐 아니라 원로정치인들의 추측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정일권 총리 세력을 견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총리 밑에서 일한 박정수의 발탁을 꺼려했다는 내용이다. 진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한번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정 총리의 추천으로 교통부차관으로 내정이 된 적이 있었다. 임명발표가 난다는 날 아침 신문에는 남편이 아니라 이재철 씨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고 나온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알아보니 정 총리는 뭔가 내막을 알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는지 “더 좋은 자리가 나올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그때 우리는 여당 중진보다도 총리의 힘이 약하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이 차관은 당시 공화당 백남억 의장과 사제지간이며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후문이었다. 백 의장님이 만일 같은 김천 출신인 후배 박정수의 차관 임명을 성사시켜주고 계속 행정부 쪽으로 길러주었다면 아마도 1978년에 있은 10대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대선배를 패배시키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귀국 후 남편은 언젠가는 김천에서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왔고 그 분도 알고 있었을 텐데 전략을 잘못 세운 것 같았다.
남매
성우는 5살, 성연이는 2살 때 한국으로 왔는데 역시 여자아이가 말을 더 빨리 배우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이화동에서 살게 되어 성우를 유명하다는 혜화유치원에 보냈다. 너무 똑똑하고 조숙한 아이들이 모여서인지 한국말이 서툰 성우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미국에서는 성우가 보통 미국아이들보다 어려운 단어를 구사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말을 시키곤 했다. 공부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어린아이들은 친구들과 다른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유치원을 잘 마치고 그 당시 입학하기가 힘들고 치맛바람이 세다는 은석 국민학교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은석에서 문제가 생겼다. 시험답안지는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학기말 학부형들이 모인다고 해서 갔더니 성우의 체육점수가 형편없이 낮아서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다른 엄마들의 충고는 내가 너무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우도 나에게 다른 엄마들은 학교를 자주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들어 넘겼었다. 한국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학생이 공부만 잘 하면 되지 굳이 엄마가 선생님을 자주 찾아가야 할 까닭을 몰랐다. 주위 사람들의 설명을 듣고 나는 무척 실망했다.
결국 우리는 성우를 이대부속국민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소문대로 그 학교는 부모가 선생님을 찾아가건 안 찾아가건 학생 위주의 평가를 해주어서 바쁜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대부속국민학교에 온 후에야 풀이 죽어있던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발표력도 향상되고 표정도 밝아졌다. 이 학교의 교육방침이 다른 학교와는 달리 그때 이미 개개인에 대한 장점을 살려주는 서구식 교육이었던 것 같다. 그런 교육 덕분에 추첨으로 입학하게 된 광성중학교에서도 성우는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했고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일등상을 탈 수도 있었다.
귀국 후 바이올린을 가르쳤더니 아이가 재미를 못 붙이고 래슨시간이 되면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바쁜 가운데도 성우를 데리고 피아노 경연대회에도 간 적이 있다. 물론 입상은 못했지만. 그래도 연습 덕분인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우가 반에서 음악 반주를 맡기도 하고 전교 음악경시대회에서 지휘도 맡을 만큼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성연이는 오빠의 경험이 있어서 대신동으로 이사가기 전에 유치원도 집에서 가까운 아주 작은 미암유치원에 다니게 했다.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가 되는 등 퍽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무조건 크고 유명한 유치원이라고 먼 곳까지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집 근처가 더 효과적이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0년 돈암동에서 이화여대 후문 쪽으로 이사하면서 성연이는 이대부속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공부도 잘 할뿐 아니라 무용도 피아노도 뛰어났고, 특히 아빠를 닮아서 노래도 잘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