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이 계셔서 아이들은 안심하고 맡기고 다닐 수 있었다. 미국생활에 비하면 아이들 키우기가 훨씬 수월했다. 다만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면서 그이는 우리끼리 살 때처럼 음악을 크게 틀어 놓거나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물론 남성위주의 한국사회에서 매일 늦게 귀가하는 생활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취미는 귀국 후에도 여전해서 돈암동에서 살다가 이대 후문 가까운 대신동으로 이사한 새집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을 ‘신촌장’이라고 부른 친구들도 있었다.
강의 준비뿐 아니라, 밤에는 외부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일이 잦았다. 낮에는 여기저기 특강도 자주 다녔지만 손님접대를 위해 집안 가꾸기와 특별한 요리 만들기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야 했다. 또한 시부모님과 같이 살다보니 우리 집은 모든 친척들이 모이는 본부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귀국 후에도 안팎으로 몸이 두 개가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그이는 정 총리를 따라가는 지방출장도 잦았다. 외국 손님이 오면 의례히 그이의 담당이었고 부부동반일 때는 나도 동원이 되곤 했다. 그 시절 우리 부부를 자주 불러주셨기 때문인지 한때 정 총리와 내가 특별한 사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하도 말 같지 않아서 웃어넘겼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날 수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정 총리 사모님과 각별한 사이었다. 공관에서 사모님께 외부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기회가 많았고 사모님은 나를 퍽 신임하셨다. 사모님은 ‘정숙’의 상징처럼 보이는 침착하고 차분하며 조용한 분으로 외출을 많이 안하시는 편이었다. 다른 직원 부인들은 지나치게 몸조심, 입조심을 하지만 10여 년간 미국에서 살다 온 나는 한국적 정치풍토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솔직한 성격 탓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취급을 하셨을 것이다.
육영수 영부인도 나를 가끔 청와대로 불러서 세상 돌아가는 데 대한 의견을 물으셨다. 그때마다 나는 솔직하게 여론을 전달해 드렸다. 당시 여기 저기 일간지에 쓴 이범준 칼럼을 읽고 전화를 하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사망 사건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했더니 몹시 놀라시며 조사를 해본 후 나에게 전화까지 해주셨다.
물론 공무원들의 해명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부인은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꼭 챙겨본다는 점이다. 영부인께 너무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혹시 남편에게 해가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면 남편은 늘 자기 생각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사실 그대로를 말씀해 드리라고 했다. 그래야 영부인이 청와대 내의 야당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아는 영부인은 용모도 인자하지만 무척 인정이 많고 온화한 분이었다. 딸아이의 투병생활에 대한 글을 신문에서 읽고 직접 전화를 하셨다. 뇌암으로 죽어가는 딸을 지켜보는 고통이 얼마나 크냐며 위로해 줄 때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리고 박 대통령에 대한 내조도 잘 하시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예로 지도자는 제한된 사람들만 만나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에 골프를 치러 가실 때도 늘 같은 사람들하고만 나가시지 말고 돌아가며 초대하라고 조언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남편은 60년대 말 대미 경제사절단의 박충훈 부총리단장을 수행했고 제24차 GATT 총회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밖에 총리를 대신해서 해외출장도 잦았다. 그럴 때면 나는 남편의 여행 짐을 싸면서 매일 아침에 갈아 신을 양말 속에 몇 자씩 쓴 쪽지를 넣어주었다.
그이는 또 시간을 쪼개어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육대학원, 연세대학 행정학과에 출강을 했다. 강의 준비하랴 직장에 나가랴 외국손님 접대하랴 정 총리를 수행하고 다니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이 또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는 일이 빈번했고 신문, 잡지사의 원고청탁도 쇄도해서 정말로 우리는 30대 초반부터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태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남편이 일찍 귀가한다고 하는 날은 모든 할 일을 낮에 끝내고 저녁에는 그이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상관의 갑작스런 부름이 없는 한 그이는 토요일 저녁부터 가족과 같이 식사를 했다. 일요일은 한때 주말 ‘골프 과부’가 되었던 때가 있었으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에는 지역구 때문에 주말 과부 신세가 되었다.
남편에게 고마운 것은 아이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무리를 해서라도 집에 와서 케이크도 자르고 아이들의 인사말이나 노래를 녹음해주는 아빠 역할을 충실히 해준 일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아이들 어렸을 때 녹음해둔 테이프가 많이 있다.
1969년 여기자클럽이 여성우위시대의 ‘외조상’(外助賞)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공처가 베스트 10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들은 양주동, 김은우, 정일권, 유진오, 백낙준, 신동, 정일형, 오재경, 박정수, 홍종인 등이다. 박정수를 선정한 이유를 ’철저히 웨스터나이즈(서구화) 한 가정구조와 페미니스트다운 미남이 스스로 길들인 공처가이며 이 커플이 보이는 애정의 조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없다‘라고 했다.
1979년 9월 2일자 주간여성에서는 한국의 ’외조남편 베스트 10명‘을 여기자 25명이 엄선했는데 이 명단에도 그이가 포함되었다. 의식부터 차별을 제거하고 아내를 여성 이전에 완전한 인격자로 우대하는 외조남편들이라고 칭찬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이는 정일권 총리를 몇 년 모시면서 정 총리로부터 몇 가지 배워야 할 점들을 발견했다. 즉 절대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고 좀처럼 자기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며 약속시간보다 10분 내지 20분전에 도착한다는 점들이다. 자기는 10분전에 약속장소에 갔는데도 정 총리는 이미 와 있어서 어느 날은 “자네가 비서인지 내가 비서인지 모르겠네”라는 농담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안 되는 일도 딱 부러지게 거절을 못하는 성품 때문에 상대방에게 거짓희망(false hope)을 갖게 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바로 이러한 성품 때문에 좋게 보는 사람들은 그분을 무난하고 원만한 분이라는 평을 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분이라는 평을 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