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출생과 박사학위 논문 (16회)
  제3장 부부 정치학박사 1호

우리는 박사학위 과목을 전부 이수해서 5개 분야의 종합시험만 남게 되었다. 종합시험은 3개월 내지 6개월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둘 다 동시에 일을 그만 둘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이가 제안하기를 내가 먼저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자기는 일하고 자기가 시험 준비하는 동안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먼저 학위를 끝내면 귀국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나의 학위는 포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보수가 더 좋은 ‘미국의 소리’ 방송국 한국과에서 원고를 번역하고 방송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반 년 간 휴직을 하고 도서관에서 종합 시험 준비를 했고 무사히 일차에 합격했다. 그 다음부터 내가 다시 미국의 소리 한국과에서 일을 하고 남편이 6개월 시험준비를 한 후 일차에 합격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친정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여기는 미국의 소리 방송입니다”라는 나의 음성을 들으려고 새벽 방송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파견된 유명한 아나운서 강창성 씨와 장기범 씨가 현지에서 채용된 사람들의 발음과 철자법을 교정해 주었다.
 
강 선생님 가족은 우리가 살던 메릴랜드 주의 아델파이라는 곳에서 살고 계셨다. 그때의 어린 세 딸들이 지금은 장성해서 큰딸인 강경화 박사는 한국외교사에서 첫 주유엔 공사로, 또 본부의 첫 여성국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그 후 다시 유엔산하 인권위원회의 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현재 제네바에서 실력을 발휘하며 국위를 떨치고 있다. (현재 외무부장관에 재임 중)

드디어 학위 마지막 단계인 논문을 쓰기 위한 장학금도 운 좋게 받게 되었다. 둘이서 매일 국회 도서관의 연구실 책상에 나란히 앉아 학위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계획하지 않은 아이가 들어섰다. 재정적 지원을 해준 단체에 면목이 없었다. 창피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임신을 해도 나는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처음이 아닌데도 유독 입덧이 심해서 몇 달 동안은 크래커 외는 거의 굶다시피 하며 버텨나갔다. 너무 힘들어서 산부인과 의사가 처방한 입덧 없애는 약을 먹어야 했다. 바로 그 약이 8년 후 우리 성연이의 뇌암의 원인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아빠가 석사학위 받던 날

1963년 7월 29일 딸아이가 태어났다. 일주일간 도서관에 못나갔더니 학위논문을 쓰던 외국학생들이 남편에게 “당신 비서가 아기를 낳았나요?”라고 물어서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그들은 늘 도시락을 갖고 한 남자 곁에 배부른 여자가 앉아서 타자를 치고 있으니 비서가 따라 다니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논문을 쓰는 도서관에는 약 10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우리는 휴식시간이면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가끔 김정렬 대사가 들르셔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고 국회 도서관의 한국과 과장으로 계시는 양기백 박사의 도움도 컸다.

어떻게 부족한 재정으로 공부하면서, 살림하면서, 친교도 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고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남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이는 늘 “당신은 super woman이야”라며 나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주중의 우리 일과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특히 둘째인 성연이가 태어난 후는 더욱 힘겨운 생활이었다.
 
아침이면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싸고 두 아이들의 기저귀, 먹을 것 등을 대충 싼 보따리를 갖고 집을 나선다. 남매를 남의 집에 맡기고 우리는 직장으로 가는 길에 바나나를 차안에서 아침식사로 먹었다. 집에서 싸간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때우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남편이 아이들 우유를 먹이는 동안 나는 식사준비를 했다. 식사 후 아이들을 씻겨서 동화책을 읽어주며 재운 다음 우리의 일을 밤늦도록 하는 그런 벅찬 생활이었다.

아이가 둘이 되니 경제적으로 더 벌어야 했다. 그 당시 국무성에서 북한의 노동신문을 번역하는 일을 얻어 그이는 번역하고 나는 남편의 논문과 번역문 타자를 쳤다. 그 일이 끝나면 비로소 우리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늘 잠이 부족했다. 성연이는 여자아이라 성우같이 엄지손가락을 빨면 손가락에 살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인공 젖꼭지를 입에 물리기로 했다. 그런데 밤이면 입에서 젖꼭지가 빠져서 다시 입으로 넣을 줄 모르니 울어댔다. 그럴 때마다 다시 씻어서 입에 물려주고 하다보면 밤잠을 설치게 되었다. 남편은 “누가 아이는 하나를 기르나 둘을 기르나 똑같다고 했지? 그 말 한 사람 데리고 와!” 라고 투정을 부렸다. 

토요일 낮에는 식료품을 사서 일주일간 먹을 반찬을 만들어 나누어서 냉동실에 넣는 일을 내가 하고, 그이는 빨래거리를 들고 공중세탁기에서 세탁을 해 가지고 왔다. 성우와 성연이가 자라면서 머리를 깎아야 할 인구가 늘었다. 그래서 나는 목욕탕에 한사람씩 앉혀놓고 머리를 깎아주는 숙달된 이발사가 되었다.

논문 쓰면서 부터는 사교 생활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이를 찾는 전화가 오면 가끔 형편에 따라 없다고 끊어 버렸다. 다행히 그이도 그렇게 할 필요성을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유일한 도미목적인 박사학위준비가 완성된 것이다.

 
  4.19와 5.16 (15회)
  부부 정치학 박사 1호 탄생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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