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가 태어난 지 일주일 후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고국으로부터의 뉴스는 우리를 무척 가슴 아프게 했으며 앞으로의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산후 조리도 못하고 나는 학교로, 직장으로 다니며, 간난 애기 돌보느라고, 남편도 학교와 직장에서 귀가하면 과외 수입을 위해 정신없이 번역일을 하느라고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4․19가 터진 며칠 후 한인학생회 회원 몇 명이 전화를 하고 모처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이 혼자서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서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당시 4․19혁명은 교포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오라는 장소에 가니 평소에 대사관을 자주 찾아다니며 온갖 도움을 가장 많이 받던 학생들, 유학생회 회장인 자기를 통해서도 한표욱 공사에게 수없이 추천서(학교 입학, 직장, 혹은 이민국에 필요한 것들)를 받아 혜택을 받았던 학생들이 모여서 대사와 공사를 규탄하고 폭행까지 하자는 제의를 하며 회장이니 앞장서라고 주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신세를 진 대사, 공사가 이미 진흙 속에 빠졌는데, 머리를 밟아주자는 것과 같다”며 “잘못이 있으면 국가에서 처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자기는 앞장 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후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그는 표현하기 힘든 큰 충격을 받았고, 미처 몰랐던 인간성의 단면을 처음으로 본 느낌이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4․19혁명 정신을 제대로 파악한 건전한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명분 하에서도 폭력은 반대라는 입장이었다.
그 후 고국에서는 장면정부가 수립되었고 고광림 박사가 주미대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정일형 신임 외무장관과 부인인 이태영 박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우리부부도 대사관 리셉션에서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날 처음 뵙게 된 외무장관 사모님이 지성적이며 자상하신 인상이었고 외모도 훤칠하셔서 당장 나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두 분의 그때 의욕에 찬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성우가 태어난 후에도 신혼 때와 같이 우리의 조그만 아파트는 친구들과 손님들로 붐볐고 고국에서 워싱턴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 아파트에서 묵고 갔다. 캘리포니아 쪽에서 동부로 오는 친구들 가족들도 워싱턴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우리 아파트 응접실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희극 배우 김희갑 씨도 있었다. 김희갑 씨가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고 있을 때 마침 경기여고 동창회 회장인 내가 모교 화재복구를 위한 모금행사를 갖게 되었다. 그 행사에 그분이 와서 한국가요를 구성지게 불러서 흥을 돋우어 주었다. 유학생들의 온갖 질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으라고 하니까 서슴치 않고 김지미 씨라고 대답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분들이 우리 아파트에서 주무시고 갔기 때문에 귀국 후 강원용 목사님의 아우 되는 강형용 박사는 박정수 아파트에서 자고 온 사람들끼리 ‘동침회’를 만들자는 농담까지 하셨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초대했다. 베이비 씨터 값이 비싸 애기들도 데리고 왔다. 요리솜씨가 없어도 몇 가지 준비해 놓고 먹는 것보다도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이 유학생부부들에게는 더 중요했다. 서로 정보교환의 시간도 되었다. 한국에서는 저녁 대접을 받으면 식사가 끝난 후 곧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당시 젊은 부부들은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 1시쯤 모두 떠나면 그때부터 나는 설거지를 하고 그이는 그릇을 높은 찬장에 넣어주었다.
친정 어머니로부터 유교적인 교육을 단단히 받고 자란 나는 어려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결혼 후에 자연스럽게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남자에게 설거지를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다. 부엌에서 밥을 풀 때면 “먼저 시부모님 밥을 푸고 다음은 남편... 네 것은 맨 나중에 푸는 법이다. 알았지?” 하시던 어머니 말씀도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아기 기저귀도 손으로 빨면 남편은 질색을 했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는 생각에서 몰래몰래 빨았다.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 생겼는데 그것은 미국 공보처에서 한국 텔레비전에 보내는 프로그램 제작을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처음에는 미국인들의 방송 프로그램을 번역해서 한국말로 더빙하는 것으로 남자, 여자 목소리를 우리 부부가 녹음하는 일이었다. 그 후부터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미국 각지를 다니며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성우를 아기 보는 아줌마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한시적인 아르바이트였지만 보수가 넉넉하게 나와서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었고 한국에서 우리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는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5․16쿠데타 소식에 우리 교포들뿐 아니라 미국 정부도 경악했다. 미국 언론에서 박정희 장군의 정치적 사상에 관한 의구심까지 거론한 것을 읽고 불안했다. 고국의 정변에 관한 우려도 잠시 우리는 고학생 부부의 하루하루 삶이 고달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고 몇 년 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유학생 대표로 대사관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박 대통령은 우리를 보고 한국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하면서 학업을 마치면 귀국하여 함께 일하자고 했다. 나는 미국의 소리 방송국의 기자로 무거운 녹음기를 메고 육영수 여사를 따라 다니며 인터뷰도 하고 리포트 자료도 준비하느라고 바빴다. 육 여사를 따라 다니며 어린 나이에도 그 분의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겸손한 자태가 말할 수 없이 인상적이었다.
한국대사관의 김동환 공사가 공화당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어서 귀국하게 되던 날 가족들과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날 아침 김 공사가 남편에게 귀국해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온갖 고생을 감수해 온 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귀국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만약 그때 박사학위를 눈앞에 두고 귀국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리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남편이 고마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