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와의 사별과 득남 (14회)
  제3장 부부 정치학박사 1호

친정어머니와 사별
 
1958년 1월 1일 새벽에 우리는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연말파티에 참석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친정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비보였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나에게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40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 5남매를 키우신 어머니의 고충을 전혀 헤아려 드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막내딸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없는 후래 자식이란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는 경기여고 졸업식 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가 살아서 네가 상 타고 졸업생 대표로 송별사를 낭독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다고 말씀하셨다.

남편 없이 자식들을 길러야 했기 때문인지 우리가 보기에도 지독하게 보수적인 분이었다. 셋째 언니가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에 다닐 때 연극반에서 ‘하믈렛’의 왕비를 맡게 되었을 때였다. 하믈렛 역은 고인이 된 최무룡 씨가, 오필리아 역은 박현숙 씨 (희곡작가)가 맡았다. 모두 중대 근처에 방을 얻어서 리헐설을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그곳까지 따라가서 같이 기거를 하셨고 남자 주인공이 언니의 옷자락만 쥐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는 것이다. 언니가 집에 와서 투덜대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음씨가 너무 고우셔서 동네사람들로 부터 얻은 별명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다. 6・25 전쟁 때도 어머니는 외상거래가 가능할 정도였다. 불교를 믿고 절에 다니신 어머니는 막내가 기독교 가정의 아들과 사귄다고 했을 때 무척 반대를 하셨으나, 일단 결혼을 하고 나니까 시어머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딸자식이 무언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딸을 많이 낫는다”는 말이 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요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푸념이다.

기나긴 이틀간의 수속을 마치고 도미 6년 만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귀국해보니 도착하기 전날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안계셨다. 결국 나는 열아홉 살 때 어머니와 헤어진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셈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비행기가 동경까지만 와서 하루 밤을 머물고 다음날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임종을 못한 것이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친정에서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나를 유학시켜 주신 박은혜 교장선생님만 뵙고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교장 선생님은 정계에 출마해서 낙선되고, 그 후에 암으로 작고하게 될 당신의 운명은 전혀 모르신 체, 학위를 마치면 경기여고에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하셨다. 지금도 그때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20대 중반에 어머니마저 잃고 나니 고아가 된 기분에 비행기 안에서 철철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다.
 
아들 '성우' 출생
 
둘째 아이 성우(John)는 1960년 4월 12일에 태어났다. 그 전날에도 남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전날 밤 많은 것을 먹은 탓으로 고생을 했다. 아기 이름은 할아버지가 성국(成國)이라고 지어주었으나, 귀국 후 동생인 딸아이가 뇌암에 걸려서, 날아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심정이었을 때, 누군가가 이름을 바꾸면 살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딸 이름을 고치면서 아들 이름까지 성우(成祐) 로 바꾸었다.
 
▲ 첫 아들을 안고

성우가 태어난 해에 우리가 좋아한 존 F. 케네데(John F. Kennedy)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기에 케네디 대통령의 첫 이름인 존(John) 이라고 지어주었다.

성우를 가졌을 무렵 나는 박사과정 마지막 과목을 수강할 때였다. 국제법 세미나 강의시간은 교수님께서 임신한 나를 위해서 자기 집에서 강의를 했고, 쿠션까지 주면서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지만 유난히 배가 부른 나는 남편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싶다고 졸랐다. 그는 펄쩍 뛰면서 여태까지 고생고생하면서 견뎌왔는데 왜 마지막 단계에 와서 포기하려고 하느냐며 장학금까지 받은 사람으로서의 책임도 있다고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바람에 그 이상 고만둘 생각을 갖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남편이 쉽게 동의를 했다면 오늘의 나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실은 둘째도 계획된 아이가 아니어서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무척 염려를 했다. 귀국 후 연속극을 볼 때 주인공이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온 가족이 경사 났다고 좋아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미국 유학시절에 태기가 있을 때마다 근심 걱정을 하던 우리의 모습과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아기를 낳고 이틀 만에 병원에서 퇴원하고 겨우 2-3일간 집에서 쉰 후 직장으로 나가야 했다. 직장과 학교에 나가는 엄마를 둔 성우는 모유도 못 먹고 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지금도 성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어느 해인가 여름방학 기간 중 우리에게 장학금을 주던 기관이 주최한 미시간 주 여름캠프에 참석해야 했다. 그래서 캠프 장소에서 가까운 미국사람 집에 겨우 걸음마를 배운 성우를 맡겨야 했다. 낯이 설어서인지 따라오겠다고 계속 울어대는 아이를 뒤로 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시간이 날 때 그 집으로 가서 기저귀만 차고 정원을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다가 회의장으로 가기도 했다.

두 살 때는 유아원에 맡기고 직장에도 가고 학교에도 갔다가 오후 5시에 데리러 갔는데 사정에 따라 늦게 도착할 때면 유아원 계단에 혼자 앉아서 우리를 우두커니 기다리기도 했다. 두 살짜리가 앉아서 엄마를 기다릴 때 얼마나 불안했을까? 우리의 박사학위 뒤에는 어린 성우의 희생이 있었다.

 
  유학생 부부생활 (13회)
  4.19와 5.16 (15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