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둘만의 신혼생활이 즐거웠다. 일하랴, 공부하랴, 살림하랴, 남편에 대한 신경을 쓰랴 힘은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이 틀어놓은 푸치니 (Puccini)의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La Boheme, Tosca, Madam Butterfly) 등의 아름다운 아리아가 들려왔다.
특히 푸치니의 토스카 중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의 “별은 빛나건만”은 하도 들어서 외우다 싶이 했다. 그는 늘 음악과 더불어 아침을 시작했고 음악을 틀지 않으면 가곡 부르기를 즐겼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 음악이 떠나지 않았고 음악은 신혼의 활기를 한층 더 불어 넣어 주었다. 기숙사에서만 지낸 나는 자취생활을 한 남편으로부터 밥 짓는 법부터 배우는 신부가 되었다. 친정 어머니가 보내주신 한식 요리책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러나 두 연인이 한 지붕 밑에서 부부가 되어 산다는 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어른들이 왜 그렇게 염려를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아기가 들어선 것이다. 너무나 막막하고 창피해서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장학금을 준 단체에도 면목이 없었고 집에서는 “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결혼을 하더니, 이제는 아기까지 갖다니, 학업은 물 건너 갔구나”라고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집에도 비밀로 했다.
근심 걱정 끝에 대책을 세웠다. 결국 대학원은 야간과목을 택하고 낮에는 파트타임이 아니라 정식 (full time) 직장을 구한 것이다. 그이는 시립도서관에서, 나는 NRECA 라는 전국 농촌전력협력기구 내에 설치된 소규모 도서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전화로 쿠폰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권 팔면 5센트씩을 받았다. 집에 와서는 임산복 호주머니에서 5센트짜리를 꺼내, 번 돈을 계산하던 내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보셨더라면 기절을 하셨을 것이다.
덕분에 달콤한 신혼생활은 단기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래도 나나 그이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박사학위를 받고 금의환향하게 될 것이라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7년 만에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된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우리는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긴축 재정 정책을 세워서 실행해 나갔다. 나는 그때부터 짠순이가 되어야 했다. 어쩌다가 외식을 할 때면 호주머니 사정 보지 않고 후한 팁을 주는 남편의 성격을 알기에, 테이블에 팁을 놓고 그가 앞서 나가면 나는 뒤에서 단 5센트라도 다시 집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들켰다. 그 다음부터는 그이는 나를 먼저 앞세우게 되어 둘이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었던 적이 있다. 휴지도 반으로 갈라서 쓰고 부엌에서는 랩이나 포일을 닦아서 두 번씩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돈이 없어도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들였다. 그럴 때면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얼음을 잔뜩 넣은 잔에 음료수를 붓곤 했다. 그 시절에는 외교관들이 가족을 동반할 수가 없어서 객지에서의 홀아비 생활이 힘들던 때였다.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 부부인 것을 알면서도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면 유학생들 가운데 제일 먼저 결혼한 마음씨 좋은 박정수 학생 집을 찾아오곤 했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면 솜씨도 없는 나는 짜증 부릴 줄도 모르고 찬밥이라도 즐겁게 대접했던 일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초창기 한 젊은 외교관은 잠이 안 오면 놀이터에 가서 롤러 코스터 (roller coaster) 를 한번씩 타고 돌아온다고 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렇게 했을까 생각하니 너무 안쓰러웠다.
워싱턴을 방문하는 귀빈들도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고, 어떤 분은 머물고 가기도 했다.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 포토막강 등 관광코스를 거쳐서 귀국할 때면 공항까지 모시고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도 워싱톤 공항 (National Airport) 가는 길에는 우리 자동차 바퀴 자국도 만만치 않게 남아 있을 것이다. 한번은 손님의 시간이 급박하다고 해서 공항 입구에서도 속력을 줄이지 않고 내쳐 달렸다. 공항경찰이 우리를 따라 와서 손님을 내려 드리고 공항경찰서 같은 곳으로 인도되었다. 벌금 티켓을 다 끊어 놓은 상태여서 도리가 없었다.
마침 그이 호주머니에 갖고 있던 장학금 증서를 보여주며 고학생이라 돈이 없으니 한달에 1불씩 갚을 수 없느냐고 사정을 했다. 야간 강의 시간에 이미 늦었다고 하소연도 했다. 한참 생각을 하던 그 경찰관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미 떼어 놓은 티켓을 찢어버려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앞으로는 꼭 조심하라는 훈시를 하고 학교에 늦지 않게 가라고 보내준 것이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만난 인간적이며 고마운 경찰관이었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학교로 달려갔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벌금을 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오면서 나는 무척 힘이 들었다. 점심은 집에서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다녔고, 남편 머리도 내가 깎아주었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깎았으나 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갈수록 손재주가 늘어서 다행이었지만. 내 옷도 패턴을 사서 만들어 입었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우리에게 무서운 시련이 닥쳐왔다. 첫 아들을 조산으로 잃어버린 것이다. 이름을 데이비드라고 지었는데... 불러보지도 못하고... 한동안 나는 몸져 누었다. 그러나 일을 계속해야 했기에 편히 누워서 앓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