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웨딩마치 (12회)

나는 여학교 진학 시 특차였던 사대부고에서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2차 구두시험에서는 떨어졌다. 그 날, 실패라는 것을 처음으로 겪게 된 충격에 나도 모르게 그만 학교 앞의 작은 개천에 빠져 죽는다고 뛰어 들고 말았다. 어머니가 잡아당겨 나오기는 했으나 입고 있던 지지미 치마가 오그라들어서 창피했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이다. 그건 초등학교에서 계속 우등을 한 나에게는 첫 시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집에서 가까운 제2 여고에 무난히 합격되자 지친 나는 2차인 경기여고 시험은 치르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자고 있는 나를 어머니가 두들겨 깨워서 연필 한 자루 손에 쥐어주고는 내 등을 문밖으로 떼밀었다. 어쩔 수 없이 정동에 있는 경기여고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날 오후 미처 내복을 갈아입지 못한 나에게 어머니가 새 속옷을 갖고 오셔서 갈아입고 신체검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원효로에 있는 금양 공립 국민학교에서 12명이 갔는데 나만이 합격했을 때 담임선생님께 무척 야단을 맞았다. 제2 여고에 합격했으면 경기여고는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고 시험을 치러가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내가 경기여고에 합격했을 때 그 누구보다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보다 공부에 열중하는 막내를 대견스럽게 여기고 시험 준비를 할 때면 당신도 안 주무시고 곁에서 바느질도 하시고 밤참도 해주시며 동무를 해주셨다. 공부 밖에 몰랐던 막내딸이, 요리도 살림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국만리 당신도 없는 객지에서 졸지에 결혼을 하게 되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이가 넷째 아들이니까 시부모님을 모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셨고 그래서 조금 안심을 하셨다고 했다. 훗날 넷째 아들부부가 30여 년간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으나 친정어머님은 못 보시고 돌아가셨다.

결혼식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니던 워싱턴 16가에 위치한 파운드리 감리교회 (Foundry Methodist Church)본당으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강원용 목사님이 주례를 맡아주셨다. 그때 강 목사님은 뉴욕에서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계셨다.

결혼식을 우리 딴에는 특이하게 한다고 미국식으로 남녀 들러리 세 사람씩을 세우기로 했다. 축가는 그 교회의 소프라노가 ‘Because you come to me’와 ‘주기도문’을 불렀는데 어찌나 잘 불렀는지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강 목사님은 “신부는 신랑에 복종하고...”를 삭제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대신하신다고 했다.

▲ 워싱턴 D.C. 파운드리교회에서의 결혼식 (1957. 4. 14.)

얼마 전 강 목사님의 손녀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목사님은 우리 결혼식을 회상하며 그때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까 많은 미국 하객들이 “왜 신랑 신부가 키스하는 순서를 뺐느냐”고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그런 장면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 한국 사람들 결혼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녀 들러리들이 상대방의 반지를 갖고 들어가야 하는데 바꿔 들고 들어갔다. 그래서 신랑은 나의 작은 반지를 새끼 손가락에 끼고 나는 신랑 반지를 낀 채 퇴장을 하다가 신랑이 반지를 떨어트렸다. 식이 다 끝난 후에 그 반지를 찾느라고 법석을 떠는 해프닝도 있었다.

결혼전야제 파티를 하는 것이 미국의 풍습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학생들이라 그런 격식을 차릴 수가 없어서 생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로버슨(Robertson)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켄터키에서 그 먼 워싱턴까지 오셔서 친정 어머니 대신 파티를 열어주어서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날 밤 파티를 마치고 늦게 집으로 가는 길에 그이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또 한 손으로 운전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모르고 지나갔다. 그러자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옆길에 세우고 “내일 우리 결혼하는 날이어서 좀 흥분했나 봅니다. 너그럽게 봐 주세요”라고 사정을 했다. 그 경찰은 꺼냈던 종이를 다시 집어 넣으면서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결혼식도 못 올리는 것 아니냐”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미국경찰의 관대한 일처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이는 유학생이면서도 그때부터 마당발이어서 미국친구들,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 유학생, 교포 등 많은 하객이 참석해 주었다. 나는 학교 장학금 외에도 Philanthropic Educational Organization (PEO)라는 여성단체와 교내 여학사협회로부터도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두 기관의 회원들이 많이 참석해주었다. 동양의 한 여학생이 결혼을 한다니까 흥미로웠을 것이고 또 도와주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혼식 피로연은 우리의 부모님 역할을 해주신 한표욱 공사 사모님, 최정림 박사가 준비해주셔서 외국하객들도 모두 좋아했다.

봄 방학 때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은 멀리 갈 수도 없고 넉넉하지 않아서 일단 가까운 뉴욕으로 갔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으나 친구를 좋아하는 그는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이틀을 지내다가 워싱턴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얻어서 가구라고는 낮에는 긴 의자로, 밤에는 침대로 사용하는 소파와 2인용 식탁뿐으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벽돌을 사다가 양쪽에 고이고 나무판을 그 위에 놓아 네 단의 선반을 만들어 책들을 꽂아 놓았다. 공부는 식탁에서 했다. 그리고 부엌 도구들은 결혼 전 미국친구들이 shower party라고 해서 결혼선물을 미리 주어서 충분했다.